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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250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한말 국권회복운동과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펼칠 정순만이 태어난 곳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 230-1 일대 충청북도 청주군 서강내이하면 덕촌리 185 가옥 변형 - 정순만( 鄭淳萬 , 1876~1911)은 충북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 반곡마을에서 정석종과 밀양 박씨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정순만은 일찍이 간재( 艮齋)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학 자로서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특히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충북·경북·강원도 등을 다니 며 의병을 모집하는 등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향리에 덕신학교를 세워 문중과 인근지역 자제의 근대교육을 위해 노력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늦어도 1897년 4월경 독립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 도총 무부장을 맡았다. 그리고 유신당 활동에도 참여하였는데, 이는 박영효를 중심으로 고종을 폐위 시키고 의화군을 황제로 옹립하고자 한 쿠테타로서, 이승만 박용만 전덕기 등과 참여하였다고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4년 출옥한 후에는 박용만과 함께 보안회에 참여하여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반대 투쟁을 벌였다. 1905년에는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상동청년회 회장 전덕기와 함께 각 도의 청 년 대표를 소집하여 을사늑약 무효를 주장하는 상소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1906년에는 이상설(李相 卨 )·이동녕(李東寧)·여준(呂準 ) 등과 함께 서전서숙( 瑞甸書塾 )을 설립 하고 민족교육과 독립사상을 주입시켰다. 그리고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 특 사로 파견되자 이동녕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 정착하였고, 1908년 『해조신문』 창 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이후 러시아의 압력 등이 있자 노령 지역의 한인지도자들과 함께 『대동공보』를 간행하였다. 19 0 9년 무렵 의병단체인 동의회( 同義會 )에 주요 인사로 참여하여 안중근 의거를 계획하는 데 참여하였고, 1910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국민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1910년 1월 발생한 소위 ‘양성춘( 楊成春) 사건’에 연류되어 양성춘의 가족들에게 보복 살해당 정순만 생가 터 해외독립운동(만주방면) 0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