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page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242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신규식과 신건식 형제가 살던 곳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 132 일대 충청북도 청원군 가옥 변형 - 신규식( 申圭植, 1879~1922)은 중추원 의관을 역임한 신용우( 申 龍 雨 )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 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신채호( 申采浩), 신백우(申伯雨)와 함께 ‘산동삼재’( 山東三才)로 유명했 다. 1896년(17살) 경기도 명문인 한양조씨 집안의 조정완(趙貞琬)여사와 결혼하고, 3개월 후 신학문 수학을 위해 상경하였다. 이후 관립 한어학교( 漢語學校)와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 군 부위(副尉 )로 진급하였다. 1901년 향리에 문동학교를 설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상하이[ 上海] 의 박달학원을 설립하는 등 구국교육활동에 힘썼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키려다 실패하자 음독자결을 기도하여 오 른 쪽 눈의 신경이 마비되어 흘겨보는 상이 되므로 스스로를 예관( 睨觀 )이라고 하였다. 이후 1910 년 망국조약의 소식을 듣고 다시 음독자결을 시도하였고, 다행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듬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정( 檉)으로 개명하고 쑨원[ 孫文 ]이 이끄는 동맹회에 한국인 으로서는 처음으로 가맹한 뒤 10월의 무창의거( 武昌義擧 )에 참가하여 신해혁명에 공헌하였다. 1912년에는 상하이에 교민이 늘어남에 따라 독립운동을 위한 교민단체로서 동제사( 同濟社)를 조직하여 이사장이 되었다.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성립되자 법무총장으로, 그 후에는 다시 총 리 대리로 외무총장까지 겸직하다가 1922년 봄에 모두 사직하고 병으로 요양하다가 9월 25일 사 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려 1962년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신건식( 申健植, 1889~1963)은 신규식의 10살 아래의 동생으로 1912년 신규식이 창건한 동 제사에 가입한 이래 계속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21년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해 가지고 돌 아가다가 압록강에서 헌병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해 불구의 몸이 되었다. 1922년 병보석으로 신의주감옥에서 출소한 후 다시 상하이로 탈출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했 다. 1939년 이래 임시의정원 의원, 1943년 3월 이후는 임시정부 재무부 차장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주중대표( 駐中代表)로 있다가 귀국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려 1977년 독립장을 신규식·신건식 생가 터 임시정부 0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