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page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222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신채호의 묘소가 있는 곳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 299 충청북도 청주군 산내이상면 귀래리 묘소 원형보존 충청북도 기념물 제90호, 현충시설(단재영당, 단재 신채호선생 동상) 신채호( 申采浩, 1880.12.8.~1936.2.21)는 본관이 고령(高靈)이고, 호는 단재( 丹齋 )이다. 1880 년 12월 8일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에서 태어났으며, 부친 신광식이 38세 나이 로 세상을 떠나자 조부 신성우는 며느리와 손자들을 이끌고 본가인 청주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이사하였다. 신채호는 1897년 조부를 통해 당시 대학자인 신기선( 申箕善)을 소개받았 고 이때부터 유학을 깊이 공부하였다. 1898년 성균관에 입교하였다가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구한말에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로 민족의식 고취에 진력하였으며, 신민회·기호홍학회 등에 가입하 여 활동하였다. 한편 『독사신론』, 『을지문덕』,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 『동국거걸 최도통전』, 『대동사천년사』 등을 저술하여 근대민족사학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1907년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사로 활동하면서 신민회에 참여하며, 1910년 신민회에서 국 외 독립군 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국외로 망명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행된 민족지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1914년에는 윤세복이 경영하는 동창학교에서 청소년 들의 국사교육을 담당하는 한편, 『조선사』를 저술하였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최초의 29인 모임에 참가하였으나, 그 해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에 이승만이 선출되자 분개하여 임시정부와 결별을 선언하고 반임시 정부 노선을 취하였다. 동년 10월 상해에서 『신대한』을 간행하여 무장투쟁노선을 지지하는 언 론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0년에는 베이징[ 北京 ]으로 이동하여 제2회 보합단을 조직하였으 며, 1923년에는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였다. 1923년 1월 상 하 이에서 국민대표 회의가 개최되자 창조파 에 가담 하였으며, 국민대표 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실망하여 칩거하면서 국사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상고문화사』, 『조 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 등을 집필하였다. 신채호 묘 계몽운동 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