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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독립운동사개관 21 환으로 여러 지역에서 의무교육이 실시되었다. 16) ㉡ 근대 사립학교 설립운동 충북에서는 청주에서 근대 학교설립이 선행적으로 진행되었다. 청주의 근대적 사립학교 설립 은 낭성면 高嶺申氏 문중의 교육운동에서 비롯되었다. 낭성신씨 문중에 의해 근대적인 학문이 포함된 ‘문중학교’가 설립된 것이다. 1901년 신채호·신규식·신백우 등이 문중자제의 근대교육을 위해 가덕면 인차리에 文東學院을 설립했다. 이들이 문중학교를 건립한 목적은 현 시세의 변화 를 널리 알리고, 근대학문을 보급하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문중학교인 德南私塾 과 山東學堂 등도 근대학문을 가르치는 사립 교육기관이었다. 문중학교의 설립을 주도했던 인물 중 신채호는 서울에서 공부하며 독립협회·만민공동회 등 에 참여했다. 고향인 낭성에 잠시 내려와 있으면서 학교를 설립하고 문동학원 강사로 활동했다. 신 규식도 서울에서 만민공동회 임원으로 활동했다가 육군무관학교 동맹휴학사건으로 고향에 내 려와 신채호와 함께 지역과 문중의 교육운동에 앞장섰다. 신규식이 1903년 가덕면 질마루에 세운 덕남사숙에서는 산술과 측량 등을 가르쳤다. 상하 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동생 申健植도 이곳에서 수학했다. 산동학당은 1904년 신백우가 당시 묵정마을에 내려와 있던 신채호와 함께 申忠植의 집에 설립했다. 이들 3인 이외에도 문중인 申 亨雨 는 낭성면 머구미마을에 淸東學校를 설립했으며, 申昇求도 문의에 文東學校를 세워 근대 교육을 실시했다. 한편 1906년 5월, 정순만이 고향인 옥산면 덕촌리에 덕신학교를 건립했다. 교육구국사상이 깊었던 그는 만주로 망명하기 직전, 덕촌 河東鄭氏 문중에 발의해 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만주 로 망명한 후에도 이상설과 함께 민족교육의 요람이라 일컬어지는 瑞甸書塾을 설립하고 교사로 참여했으며, 연해주에서도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민족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덕촌에는 덕신학교 설립 이전부터 이미 문중의 宗學稧 가 조직되어 있었다. 당시 문중 교육사 업을 주도한 鄭在浩 가 종학계 조직부터 규약 정비, 학사 건축, 경사 비치까지 솔선하고 있었다. 그가 5천 문(文)의 학사건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문중에 창건 계획을 알리자, 종인들이 적극 호응해 몇 백 문씩의 자금을 선뜻 기부했다. 아들 鄭斗鉉도 부친의 교육사업을 이어받아, 직접 문중 자제들을 대상으로 강학을 했다. 1901년 간재 전우가 덕촌을 내왕하며 강회를 열었는데, 강회에 모인 간재의 문하생 수가 3~4백 명에 이르렀다. 이 많은 인원을 수용하며 강회가 열린 장소가 정두현과 鄭海觀의 ‘ 里塾 ’이라는 기록에서 학사의 규모가 꽤 컸다는 짐작을 할 수 있다. 덕촌학교는 이러한 덕촌리의 교육 전통을 계승한 근대교육기관이었고, 옥산초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17) 1900년대 교육자강운동의 일환으로 사립학교 설립운동이 전국에 들불처럼 확산되자, 일제 는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민족교육이 이루어진다고 판단하고 규제에 들어갔다. 표면적인 이유는 난 16 김건실, 2019, 「한말 청주지역의 국권회복운동」, 『청주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청주문화원. 17 박걸순, 2017, 「鄭淳萬의 교육구국사상과 淸州 德新學校 설립」, 『韓國學論叢』제48집, 215~2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