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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 사적지 기초조사 보고서 20 보복을 자행하였다. 12) 李 康秊 의 『 雲崗倡義錄』 말미의 「 將任錄 」에 등재된 현역 의병장 122명(장임·참모·종사)을 분 석해 보면 평민:양반비가 87:13%로 평민들이 주도계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재정을 지 원한 坐從事 100명은 양반이 61명(61%), 평민이 39명(39%)으로 나타나 다수의 양반계층도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현역 의병장과 좌종사를 모두 합산하면 양반 77명(35%), 평 민 145명(65%)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13) 한편 여타 자료를 종합하면 1907~1909년간 의병장 가운데에 평민 의병장 비율이 70~75%에 달하는 새로운 양상을 보인다. 14) 이는 한봉수 의병부 대에서도 확인되며, 15) 충북지역은 물론 전국 의병의 성격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통계이다. ② 애국계몽운동 ㉠ 망국의 위기의식과 계몽운동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노골적으로 국권을 탈취했다. 한국 의 경제력을 장악하기 위해 세무행정은 물론, 사법제도를 강화하고 감옥을 신설했다. 한국민들 은 예상과는 달리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을사늑약까지 강행하자 국망의 위기감을 더 욱 절감했다. 위기의식은 국권수호를 위한 교육자강운동과 계몽단체의 조직으로 나타났다. 한 말 전개된 계몽운동은 새로운 국제질서에 강제 편입되면서 급격한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고자 전개된 운동이었다. 개인의 자아를 계몽시키는 측면으로도 활성화되었지만, 나라의 위기의식 이 커지자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운동으로도 확산되었다. 많은 지식인들은 근대문물의 유입과 신 문 화 교육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국가에 존망의 위기가 닥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근대 교 육기관과 계몽단체를 설립하고 자강을 위한 계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국 권회복의 일환으 로 가장 주 목 된 분 야 는 근대교육이었다. 1910년 경술 국치에 이르기까 지 사립학교·야학·강습소 등 6천여 개의 교육시설이 전국적으로 설립되었다. 특히 사립학교 설 립 운동은 민족의식의 고취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추진되었다. 충청권의 근대교육운동은 중부 이북지역에 비하면 비교적 더디게 진행되었다. 의병세력이 강 했던 지역에서는 문화적 위기의식과 더불어 계몽운동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부정적이었 기 때문이다. 더욱이 후기의병이 강하게 일어났던 지역은 병화로 인한 사회적 불안이 채 가시지 않 았기 때문에 계몽운동의 진행이 더욱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식민지화가 노골적으로 진 행되면서 이러한 인식도 변화했다. 식민지화를 막을 수 있는 대안을 계몽운동이나 근대교육 운 동에서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근대교육을 의무화하는 방안이 점차 논의되었고, 지역자치제의 일 12 조동걸, 1989, 『한말 의병전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85~187쪽. 13 雲崗李康秊先生紀念事業會, 『雲崗李康秊先生倡義錄』, 125~146쪽. 14 朴成壽, 1980, 『獨立運動史硏究』, 창작과 비평사, 222~224쪽. 한편 이 자료는 각도 경찰서 보고에 의거하여 내부 경무 국이 작성한 暴徒首魁調(1908년 10월)와 한국주차헌병대가 작성한 暴徒首魁名簿(1909년 3월) 및 북부수비관구의 暴徒首魁名 簿(1909년)에 의거한 것이다. 15 朴杰淳, 1996, 「義兵將 韓鳳洙의 抗日鬪爭」, 『한국독립운동사연구』10, 269~2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