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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110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1907년부터 1910년까지 한봉수 의병부대가 활발히 활동하고, 3·1운동 때 한봉수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있었던 곳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세교리 244 일대 충청북도 산외일면 세교리 시장 변형 - 한봉수는 세교리 출신으로 세교장터를 중심으로 활발한 의병활동을 벌였다. 1907년 11월 2 5 일 세교시장의 일본인 금광업자를 습격하여 그 집을 불태우고 재물을 군자금으로 수취하였 고, 1908년 1월 9일에는 세교장에서 군자금을 모금하고, 일본헌병대에 의병을 밀고하여 큰 해 를 입힌 전 진회원을 추적해 처단하였다. 또한 한봉수는 세교에서 일본군이 운반하는 우편행랑을 자주 습격하여 군자금을 획득하 였 다. 2월 25일에는 의병부대원 2~30여 명이 세교에서 충주로 가는 등천지야(藤川知也)와 전중 정일랑(田中定一郞)의 우편행랑을 습격하였고, 4월 3일도 우편행랑을 습격하여 군자금을 획득 하였다. 또 5월 9일에도 초정에서 우현행랑을 습격하여 호위 기병 1명을 죽이고 군자금 획득하 였고, 12월 2일 10명의 의병이 청주로 오던 우편행랑 일행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후 1910년 체포된 한봉수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5년 유형으로 감형되었다가, 합방대사령( 合邦大赦令) 으로 출옥하였다. 한편 한봉수의 독립운동은 의병활동에만 그치지 않고 1919년 세교리 장터에서 3·1운동을 주 도하였다. 1919년 4월 1일 밤 한봉수( 韓鳳洙 )·이태우(李太雨)·임봉수(林鳳洙 )는 세교리 장터에 서 다른 주민들 수십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한봉수는 다음날 2일 정오 경 세 교장터에 주민이 모여 있을 때, 나무를 심기 위해 지나가던 내수보통학교 교사 엄익래(嚴翼來 )· 이건간(李建簡 )과 학생 약 80여 명 등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여 그들과 함께 만 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주모자로 체포된 한봉수는 징역 1년, 임봉수·이태우는 태형 90대를 언도받았다. 청주 중앙공원에는 한봉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송공비가 있다. 현재 세교장은 없어졌으며, 민가가 들어서고 밭으 로 일부 사 용되고 있다. 세교1리 입구에는 가는다리(細橋) 유래비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 내용에 따르면 1910년 대홍수로 서당리에 있던 세교장터 의병운동/3·1운동 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