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page

식(1887), 민영상(1891), 민영준(1891), 민영소(1891), 민두호(1893), 민영환\1894) 둥 민씨 척족들을 앉혔다. 고종은 민씨 척족틀을 내무부의 독판, 협판, 참의 를 비롯하여 의정부와 6조의 당상관, 지방관, 주요 군 요직 퉁 요소요소에 포진시켜 친위세력을 삼았 다. 이 시기 중앙과 지방 관직에 진출한 민씨 일족은 260명을 헤아렸다. 뜸히 내무부 인사는 의정부를 거 치지 않고 국왕에 작접 보고히는 체제였다. 수많은 민씨 일족들이 의정뿌의 천거과정을 거치지 않고 내 무부를 통해 고속 성장했다. 그 결과 정부는 국가를 유지관리하는 의정부 기능과 개화자강 업무를 추진하는 내무부로 이원화되었 다. 이둘사이에는엽무가중복되어명확하게구분되지못하였다. 이 때문에서 로경쟁하는기운데 딸력과마찰이 일어나기도하였다. 국정은의쩡부가중심이 된 합의제로 운영되꺼 못하고 국왕의 상의하달식으로 이루어졌다. 의정부 관 료들은 내무부 중심섹 개화시책과 월권에 비판을 제기했다. 고종은 내무부를둘러싼의정부 대신들의 비판에 귀를 귀울이고, 정부 내 불 협화음을 최소화해야 했으나 이러한 노력을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운영해 갔 다. 내무부에 대한편애는심화되었고,조정에서는그누구도직언을할수 없는 분위기가형성되었다. 대신 이하관료들이 국왕에게 정무를보고~8l는차대次對 는 1885년부터 1894년 고종의 개혁정치 10년 동안 연 평균 3회를 넘지 않을 정 도로 신료닮倚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내부 분열은 종주권을 행사하려는 청국에게 기회였다. 민왕후의 조카로서 고종의 핵심 친위조젝인 내무부의 부사였던 민영익조차고종이 러시아세력과 연대하려 한다는사실을 청국에 밀고하였다. 청국은 고종에게 입-력을 가해 친 러파를제거할것을요구하였다. 1887년6월 29일박정양을초대주미전권공사 로파견하자청이 강제소환을요구하여 결국박정양은부임 10개월 만에 워싱 턴을 떠나야했다. 박정양은 위안스카이 의 문책이 두려워 일본에 1년 이상 장 기 체류한끝에 1889년 7월에야귀국하여 고종에게 복명할지경이였다. 조 (] 고 제1편 | 국제정세의 변화와 조선의 위기 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