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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손金長孫과,유복만의 동생 유춘만柳春萬은통문을돌려 군병의 결집을호소 했다. 6월 9일 군인들이 동별영束~I]營과 경기감영의 무기고를 습격하고 포도청 에 난입해 동료를구출한뒤 척신과개화파관료의 집을습격했으며, 대원군을 찾。}가 지침을 구했다. 저녁에는 일본공시관을 포위, 공격해서 불-태웠다. 하나 부사花房 義質 공사는 가까스로 인천으로 탈출해 일본으로 도냉하였다. 군란 이 틀째인 6월 10일 사태는 더욱 확대되어 영돈녕부사 이최웅주파뺀이 살해되었고, 뒤이어군병들은궐내로난입하여민겸호와김보현을찾아내살해했다. 이어 민 씨 척족의 비호자인 왕후 민씨(후에 명성황후)도제거하려고 찾았으나, 민비는궁 녀로 변장하여 가까스로 탈출해 광주 • 여주를 거쳐 장호원으로 피신하였다. 고종은 대원군에케 사태 수습을 맡겼다. 대원군은 민비의 행방을 알수 없자 죽은 것으로 판단하고 장례를 선포하고 장례식을 치렀다. 또한 통리기무아문 을 폐지하고 종래의 5군영과 심군부를 부활시키고 군권과 재정권을 장악하였 다. 또한 민씨 척족 세력을 제거하고, 위정척사운동으로유배되었던 유생들을 풀어주어 보수세력이 다시 살아났다. 서울을 탈출한하나부사 일본공사 일행은 6월 15일 나가사키찮뼈에 도착, 군 란사실을외무성에 타전하였다. 이에 일본정부는하나부사공사와함께 4척의 1E ’ 82 임오군란 선혜정 사진 제1편 | 국제정세의 댄화와 조선의 위기 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