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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꿇敎~ 훈격 건국포장(2010) (양)1901. 3. 30.∼(양)1945‘ 4. 25. 경기도고양군정뚱리 378번지가본적및주소인김교신은함량농업학교졸 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2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하고, 지리, 박물과로 전과하여 1927년에 졸업하였다. 일본 유학 당시 군국주의에 반대하 고 일본 기독교의 지푸성을주장하면서 무교회운동無敎會週뼈j을 전개하던우치 무라內村짧三의사장에 영향을받아유학생이던함석헌成錫꿇,송뚜용宋斗用, 정 상훈鄭相勳, 양인성梁仁性, 유석동柳錫東 등과 함께 동경에서 조선성서연구회朝 빡뿔뿔;冊究會를조직하여 우리말성경을 읽고 연구하였다. 1927년 7월 송두용, 정상훈, 양인성, 유석동 둥과 협의하여 월간 동인지 『성 서조선뿔핍朝蘇』을 알본 동경에서 창간하였으며, 1930년 5월 제16호부터 혼자 서 주필 겸 발행인으로 『성서조선』을 발행하였다. 한편 김교신은 1927년 일본 에서 귀국한 이후 함흥영생여자고동보통학교와 양정중학교, 경기중학교, 그리 고 개성 송도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퉁주로 민족사학民族私學의 교사로 재직 하면서 많은 제지뜯룰끓 양성하였고 무교회주의를 실천한종교인이자 교육자로 평생을살았다. 김교신이 주필 겸 발행인으로 간행하던 『성서조션』은 1934년부터 폐간되던 1942년까지 조선총독부로부터 출판물 입수와출판금지 처분을 10여 차례 받았 다. 특히 1937년 중알전쟁 이후의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 강화된 출판법 적용 으로 인하여 여러 차폐의 출판금지 처분을 받은 『성서조선』은 1942년 3월호 의 권두언인 ‘조와렴峰’에서 조선민족의 소생을 노래했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로 부터폐간을당하였따. 김교신은 1942년 3월 30일 소위 성서조선사건과 관련하여 함석헌, 정상훈, 송두용퉁 12명과함께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고, 1년동안미결수 상태로서대 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43년 3월 29일 석방되었다. 이후 1944년 7월 일 본질소비료공장흥남연료용흥공장(홍남질소비료공장)에 취업하여 또선인 노무자 부록 4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