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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자혜朴孫惠 고양군 숭인면 수유리 433번지가 본적으로, 단재꺼짧 신채호申宋浩의 부인이 다, 그녀는조선총독부 부속병원의 조산원助윷員으로근무하던 중; 1919년 3 · 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필주李弼柱 목사와 연락을 취하며 같은 병원의 조산원 과간호원들로조직된간우회看友會의 회원들을규합하여 비밀리에 각종유인 물을 배포하였다 . 또한그해 3월 10일 간우회원들을주도하여 독립만세시위운 동을 폈다. 그녀는그해 3월 같은 병원내의 통료들과 김형익金衝짧퉁의 한국인 의사 를규합하고시내국 • 공립병원직원들의 동조를얻어 태업을주도하다가 일경에피체되었다 1920년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던 김용채金容採 동 3명의 의사가 사직하자 그 녀는 더 이상 일제를 위해 일할 수 없다고 결심하여 병원을그만뚜 고중국 지린 성吉林省으로 건너갔다. 그후베이징에서 이화영의 부인 이은숙여사의 중매로신채호와결혼한그 녀는 이후 남편을 따라각지를 전전하면서 온갖 고통과 역경 속에서도 애국지 사들의 독립운동을 모왔다. 1924년 신채호가 일경에 피체되어 따렌大迎 감옥에 서 옥고를 치르게 되자그녀는베이징北京 • 텐진天律 퉁지의 독립운동가와국 내인사들과의 연락엽무를 띠고 귀국하였다. 1926년 12월 나석주羅錫않 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쪽파의거 당시사전에위치 · 지리를안내하속E둥독립지사 들간의 연락과 편의제공에 힘을 쏟았다. 이와같은 활동을 펴면서 그녀는 일경 의끊임없는감시속에수없이 연행되어고초를겪었다. 그녀는생계를위해 인 사동 69-1에 박자혜 조산소 를 열었으나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그녀는 신채호가 뤼순旅뼈 감옥에서 순국한 후 병을 얻어 1944년 10월 10일 영변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씌 공훈올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초 1을 추서하였다. ※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음. 부록 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