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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경찰은 송 의사를 ‘살인 및 상해죄’로 기소하여 예심애 넘겼고, 예심이 진행되는 동안 6 . 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7월 15일 제1회 팡판이 열린 경성 지방법원에 사람렐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법원은 강도몰아가려 했다. 송 의 사는 “내가 언제 강도질을 하였소?‘’, ‘·총독을 암살할 목적”이었다고 밝혔다. 재판장이 “피고는- 어떤 주의자인가, 사상가인가?”라고 묻자 ,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 다만, 우리나리를 강탈하고 우리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 번죽어도마rxJ 하다는것만은잘알고있다 . 그러나총독을못쭉인것이저송에 가서도한이 되겠다.”라고대답하였다. 7월 23일 판사눈송의사에게 살인 및 살인미수죄 로사형을-선고하였다. 본 인은 공소제기를 거부하였으나, 가족의 간절한 권유에 따라 꽁소를 제기하여 10월 11일, 11월 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이 열렸을 때도 참관하는사람들이 법정을 가득 메웠고, 법정밖에도 방청권을 받지 못한사람들로 혼잡한 지경이 었다. 11월 10일겸성복심법원재판에서 다시사형이 선고되었다. 가족들은고 등법원에 상고했다. 1927년 2월 3일 고등법원은 “이유가 없다.”며 기각했다 이로써 사형이 확정되아 1927년 5월 19일 오후 2시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집행하였다. 향년 30세의 한창 나이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ti I싸 국가보훈처 송헌주宋憲樹(이명 ; 憲柱) 훈격 독립장(1995) 1880. 10. 22. ∼1965. 7. 31. 고양군용강면 공덕리 62가본적이며, 구한말관립 영어학교英語學校를졸업 한뒤, 1904년경 짜와이로건너와서 1905년하와이섬 고할라치역에서 목사로 서 「교회월보」를 발행하는 한편 통년 8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하와이 지역 456 고양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