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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각기병은티아민(비타민 B1)이 부 족하여 걸리는일종의 영양실조증세로다 리가붓고팔다리에 힘이 없으며, 늘피곤해 하는병이다 그러나같이 회사에 다 니던아우 .삼학선’과의 불화 때문이라는동생의증언도있다. 아무튼회사를그 만두고각기병을 치료하면서집에서시간을보내다가 1925년봄에완쾌되었다. 송학선은 어려서 하얼빈 역두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의 의 거를 듣고그를환모하면서 자신도 안중근 의사와같은 의거를 할생각을 했다. 그는목표를조선총독으로삼았다. 건강을회복하자 1926년 3월 경성 남대문통 3정목의 경성사진관京城휠짧핑에 집수리 일을 나갔다가 부엌 바닥에 딸어져 있 는 양식 칼을주워 가지고 왔다 손잡이가 흰 뼈로 되어 있고 칼날이 13.6cm 가 량되는고급과일칼이었다. 선생은 이것을숫돌에갈아미닫이 창틀위에 숨겨 놓았다. 그는날품팔이를그만두고장사를 계획했다. 그러나장사댐천이 없어, 어머 니가전당포에 겨울옷가지를잡혀 마련한3원을가지고장사텔장소로보아두 었던 장춘단으로 갔다. 마침 그날이 융희황제가 붕어한 1926년 4월 26일이었 다. 장사를나갔던송학선이 급하게 집에 돌아와저고리를벗고, 셔츠에 OJ-복저 고리를 차려 입고 창덕궁으로 달러갔다. 장춘단에서 융희황제 붕어 소식을 듣 고 장사물품도 팽개친 채 칼을 가지러 왔던 것 같다. 창덕궁 앞 빈소의 밍꼭 대열에 참여하였다. 빈소의 출입문윤 창덕궁 서남쪽 의 금호문이었고, 그 문을통하여 총독부고관들이 출입하는것을 보았다. 총독 도그 문을통하여 들어오리라생각하며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호곡을 하며 기다렸다. 그러나총독은 오지 않았다. 일제는 융희황제가 붕어하자 체2의 3 . 1운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하여 이튿날부터 인천 • 파주 • 수원 • 개성 동의 경찰병력까지 서꼴로 집결시켰다. 돈회문 앞에 임시 경비사령부가 설치되었다. 경찰과 기마순사와 헌병까지 동 원하여삼엄한경계를폈다. 다음날인 4월 2:7일에도칼을품고 창덕궁 앞에 나가사이토총독이 나타나기 를기다렸다. 오지 않았다. 그다음날인 4월 28일에도칼을품고오전 11시쯤돈 화문근처에 도착하여금호문주위를서성이며 기다렸다. 정오쯤일본인 세 명 454 고양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