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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세趙秉世가 을사조약을 반대하며 순국하자 조상갔다가 오는 길에 남대 문근처 한 점포에서 아편을 사서 간직하고 다시는 대궐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일사보국할 결심을 하고 기회를 보고 있었다. 1907년 군대 해산 후에 숭신면 번리(현 강북구 번동) 오현의 창녕위궁 재사齊 舍로 들어와 거주하며 왕실 친척들의 밑으로, 전국 유생들의 뜻을웅 모으는 역할 을맡았다. 1910년 8월 일제가우리나라를 병탄한 뒤 조선의 전직 고위관료들에게 작위 簡位 또는은사금을주었는데, 일제는그에게 남작의 작위를주어 회유하려 하 였다. 그는 일제가 주는 작위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일제의 병판에 항의하여 1910년 9월 8일 창녕위궁 재사에서 간직하였던 이편을 먹고 자절하였다. 고종 과 순종이 위로금을 내려주며 그의 죽음에 조상하였다. 그의 문집인 『오첸실기』에는 철인왕후의 만장, 명성황후, 명헌태후 홍씨의 만장이 있어 그가왕실에서 했던 역할을보여준다. 그문집에는순원왕후 김씨 가김병주의손자로입후한뒤에내린어찰도실려있다. 『오천실기』에는그외 에도을사조약 이후에 올린 두차례의 「토역소」 퉁과 함께 한일병합조약 당시 에 활동도이들김영한이 「읍혈록位血錄」이라는이름으로자세한경과를 기록 하여 두고 있다. 그 외에 『기려수필騎짧隨筆』 『조선귀족열전朝蘇貴族列傳』 퉁에 도관련자효료가실려 있다. 김병주기를 이은김석진의 후손들은김석진의 다음대에는근패화라는이름 하에 명맥이 끊겨가-는한문학의 전통을 이어 주었다. 그 역시 아 뜰이 없어 김홍 진의 아 들인 김영한金鍵漫을 맞 아들여 후사로 삼았는데, 김영한뜬 호가 동강束 江으로그의 문집 『동강집』이 규장각둥에 소장되어 있다. 『동깅-집』안에는도 봉산과 창녕위 재실이 있던 오현챔뼈 둥에 대한감회를옮은 시들이 몇 편 들어 있다. 또 다른 손자띤 김웅한은 김석진에 관한 기록들을 모아 『오천실기챔혔實 紀』를 엮고 김석진을-추장하기 위한 일들이 거의 그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그 의 글들은 『급우재접及週짧짧』이라는 문집으로 전한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부록 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