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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윤李햄允 훈격 대통령장(ll 962) 1856. 12. 29.∼1940. 10. 20. 이범윤은 경기도 고양 高해 출신으로 이경하 李景夏의 이 들로 태어났다. 조선말국내의한업경제가파탄지경에이르자많은조선농띤들이간도間島 로 이주하여 농경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81년에 이르러 청국은 간도 지 방을개간한디는명목으로조선 농민을추방하려는움직임이 있자긴-도의 영유 권문제가제기되었다. 이에조선정부는 1883년에 어윤중魚允中을 서베이징략 사西北經略使로 파견하였다. 어윤중은 토문강土門江이 송화강의 상류인 도문강 圖們江애 틀림없으므로간도는 마땅히 우리 영토라고주장하여 씨를굽히지 않 았다. 그후에도조朝 · 청消간에 간도문제가 여러 차례 제기되었으나해결되지 못한상태에서 190〔)년에 이주농 민의 수가 6,7만명에 이력 l 띄었다. 청국은 이들을 몹시 박대히였다. 정부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북변간도관리사北邊間 島管理따를두 게 되었는데, 이때 이범윤이 그직을맡고파견되었1 과 1902년 6월 간도에 도착한 이범윤은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포대私뼈隊(일명 관리병숍理 兵)를 조직하였다. 그 후 러 • 일전쟁이 일어나자 이범윤은 노군측에 가담하여 한국을침략하는일본군을공격하였다. 1905년을사조약으로대한제국의 외교 권이 없어져 그도 칠수하게 되었으나, 그는 철수하지 않고 그는 항일투쟁을 전 개할 돗으로노령 연해주로망명하였다. 이범윤은무기를구입짜고군사를 훈 련하여 국내 침공작전을 감행하그l자 하였다. 이때 노령 연해주에 있어서의 한 인들의 항일 무장 활동 기지는 연추煙秋였다. 1908년 이후 국내 꾀병 항쟁이 점 차 북상하여 함남 · 함북 일대로 확산되자 이범윤은 창의회影義會를 중심으로 광범한 모금幕金 • 모병흉兵운동을 전개하였다. 많은 애국 동포짜 청년들이 여 기에 호웅하여 30만원에 달히는 성금이 들어오고 4천병 정도의 애국 청년들이 연추로모여 들었다-. 이들은 이곳 한인 부락에 유숙하면서 군사 훈련을 받았으 며참모진은러시아당국에교섭하여러 • 일전쟁때 쓰딘러시아군의폐총불하 를교섭하는한편간도혼춘椰春의 청국당1국에도무기공급을교섭하였다 그 부록 4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