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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톨-- 김익상金益-tn 훈격 대통령장(1962) 1895∼1925. 6. 6 김익상 의사의 본적은 경기도고양군高|꿇삐 용강면龍江面 공덕꾀孔德및 286번 지로, 출생연도는 일 수 없는데, 1922년 상해 황포탄 의거 당시 나이가 28세로 보도된 사실을 감안하면, 1895년생으로 생각된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넉넉하지 못한 성장기를 보냈다. 사숙에서 한문을 공부 하고 마포에 있던 삼호보성소학교三때팔成小헬校에 다녔으나, 집안이 어려워 학 업을 마치지 못하고 철공소 견습공으로 취직하였다. 1919년경에는 서울 교북 동橋北洞에 있는광정연초공사廣盛煙草公司로옮겨 근무하게 되었고, 1921년6월 경 봉천지점의 기계감독으로 발령이 나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써렸을 때부터 비행사가꿈이었던꾀사는중국전보발령을반겼다.꿈을이룰끼회로생각했 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봉천에서 공사公司 감시원 송통휘宋東輝와 의논하고 비 행학교가 있는광동짝교로갔으나당시 중국은 내란중이었던 관계로비행학교 가 폐교되어 뭇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그 후그는 이정룡李正 패.이명 오성륜낯成휩과 같이 서양인 구이르드가 경영하는 전7-}폐사의 전차감 독이 되면서 베이징北京으로가서 의열단장;잖烈團長 김원봉金元m을 만나의열 단에 입단하였다. 그러고곧조선총독사이토마코토없峰뀔를처단하기로계획 하고폭탄 2개와권춤두자루를받아 1921년 9월 10일 베이징을 떠나통월 11 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디음날인 12일에 그는 전기수리공으로 가장하고 총 독부에 들어가서 폭탄 2개를 투척하였으나 1개는 불발하고 한 개만 폭발하였 다. 거사 직후 피신하여 일인 요리점으로 갔다가 다시 철공으로떤장하고 기차 를타고평앙에 도착,그곳에서 수일간체류하다가베이징으로톨i아갔다. 그는 총독부 투탄 거사가 성과를 보지 못하자 재거할 것을 결심하고 꾀열단장 김원 봉金元때과 상의한 다음 1922년 2월 상해로 가서 동지 오성륜吳成짧(원명 이정룡 후正龍)과 함께 동월 낀8일 오후 3시 반경 상해 세관投關 부두에서 펼리핀Jtfl쫓으 로부터 상해에 도착하는 일본 전 육군대신 전중의일田 ,,,義- 육군대장을 향하 부록 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