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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5월 7일 호남성의 수도인 창사長沙의 조선혁명당당사사무실이 있는 남목청뼈木廳에 김구 金九 · 이청천李좁天 • 유동열柳束說 둥과 함께 모여 한국국 민당 • 한국독립당(째건) • 조선혁명당의 우파 3당의 통합을 위한 첫 회의가 열 렸다. 이때 조선혁명당원으로 난정에서 상하이로특무공작을 가고 싶다고 해 서 김구가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던 이운환쭈雲;煥이 갑자기 돌입하여 권총을 난 사하였다. 첫발에 김구가맞고, 두번째총탄에현익철이 맞아중상을입고병원 으로 옮겨졌으나, 도착하자마자 절명하였다. 이밖에 유통열이 즙;상을 입었고, 이청천은경상을입었다. 김구는거의절명상태에빠졌다가살아났다. 이른바 ‘남목청補木廳사건’또는.장사長沙 사건‘이라부르는이사건으로안해정당통합 문제도 더 이상 진척되지 못하였다. 그러나일제의 패망이 예견되는가운데 전시체제에 대비하며 임시정부를 뒷 받침할수있는정당의 출현이 요구됨에 따라우파 3개 정당은 2년후인 1940년 5월 8일 각기 해체선언을 발표하고 9일에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충칭 정착과통합적 구심력 확보 1932년 이후 상하l를 떠나 8년간 중국 각지를 떠돌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0년 충청에 안착했다. 중국 국민정부가 일본군에 밀려 충칭끊 임시수도로 삼았던까닭이었다. 임시정부 충칭시대(1940∼1945)는 한국독립운동에서 임시정부까 정부로서의 진정한기능과 역할을수행한시기였다. 첫째, 1930년대 후반 이래, 독립운동의 주요 무대가 대폭 변화를 겪었다. 국 외독립운동의 주요근거지였던서북간도 • 만주지역은 1931년 띨제의 만주침 략을 계기로 상실하고 독립운동 세력은 중국 관내로 이통하지 않으면 안되었 다. 연해주지역은 1937년 한인들이 강제이주를 딩해 중OJ아시아로 가게 되면 서 독립운동의 기반이 사리쳤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어나 중국 관내도 항 일 • 반일의 경계선이 만주에서 화북이남지역으로이통하게 되었다. 이러한 독립운동의 여건변화로인해독립운동세력은중국양자강이남으로뻗쳐오는 일본군에 대항하여 층칭 임시정부를중심으로 한국 독립운동의 민족통일전선 제5면 | 일제 침략전쟁의 확대와 항일독립운동 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