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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慶으로후퇴하며 계속 항전했다. 공산당 토벌에만 전념하던 장제스將介石의 국민당은 마오쩌뚱毛擇束의 공산 당과손잡아 1937년?월,제2차국공합작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1938년 말부터 ‘국공합작’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여 1939년 이후는 실질적으로 서로 견재 하여 양 세력은 별개로 일본항전을 전개하였다. 국민당의 정부균은 중잉군의 정규전을 중심으로 땅전을 전개하였다. 공산당은 팔로군八路파 • 신사군新四軍 을중심으로유격전월전개하여 전력을보존하면서 일제 침략군의 기동력을묶 고 일본군의 전력을 소모시키는 작전으로 대항하였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중 국민중의 항일의식이 높아져서 물자부족과 인플레이션에도불구하고 전투인 력은오히려 증강되써 갔다. 일제의전시총동원체제 중일전쟁 이후 전선이 확대되어 가자 1938년 3월 일본의회는 국가총동원법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띄회의 동의 없이 전쟁 수행에 필요한 어떤조치라도즉각 취 할수 있게 되었다. 전시총동원 체제 하에서 일본본국뿐만아니라식민지 한국민 에게도정신동원 • 인력동원 • 물지동원을강제하여한국민을고통으후콸않다. | 정신동원 | 신사피I~社는 일본 고유의 민간종교인 신도피111道의 사원이다. 메 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국민통합을 위해 일제는 각지에 신사를 컨립하고 천황 및 천황의 선조를신사에 모셔 숭배했을뿐 아니라, 살아 있는 천황도 신격화하 여자국국민들은물론한국민에게도정신적중심으로삼아군국뚜의적침략정 책 및 식민지 지배에 이용하였다. 특히 1930년대에는 일제가 대확침략을 재개 하면서 기독교계 사립학교까지 신사참배를강요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한국민을 완전히 일본인화하는 .황민화정책’의 일환으 로 제령 제20호로 「또선인 씨명에 관한 건」을 발포하고 1940년 2월 11일 창씨 개명을 강제로 시행하였다. 1940년 8월 10일까지 6개월간 모든 한국인은 김 • 이 • 박같은성姓을 버리고일본식으로새로씨명民名을결정해서 신고하도록 명령하였다. 일제의 선전과 강요에도 창씨개명 실적이 미미하자, 관헌들을 통 제5편 | 일제 침략전쟁의 확대와 항일독립운동 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