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page

난시위는사범학교담이무 너질 정도로 격렬하였다. 동대문 앞 시위 현장에서는 일본 기마병의 말발굽에 치 거나 밀려서 쓰러진 사림들 로 혼잡을 이루었고, 70∼80 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만세운동은 오후 2시 무렵 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1926년순증인산일에발생한 6. 10만세시위장면 권태균사진 일제 기마병과 군경의 삼엄한 경계로 일반군중은 호응하지 못하였다. 6 월 12일의 반우식退짧式 때에도 학생들은 시위할 계획을 세웠다. 일제 당국 은학생들의 봉영을전면금지하고경찰과군인들을투입시켜 겸계하였다. 배 재고보를 비롯해 협성학교 • 피어선 성경학원 · 기독교청년학원 등의 기독교 계통7개 학교 학생렐이 피어선 성경학원 기숙사에 모여 격문수만장을 인쇄하 던중 6월 16일 일경의 습격을받아계획은좌절되었다. 6 . 10만세운동은 3• 1운동을 경험한 일제의 강력한 사전검속과 경계태세 로말미암아기대했던대중시위운동으로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6 . 10만세 운동은한국독립운꽁사의 민족주의계열과사회주의계열의 운동세력이 공동전 선을편좌우합작의 첫사례로꼽힌다. 이후이듬해신간회를통한민족통일전 선운동으로 나아가게 해 주었다. 신간회운동 | 신간회 I 3 · 1운동이후일제의 기만적인문화통치 아래국내 민족운동은 민족주의운동과사펴주의운동으로갈라져 대립 • 갈등하였다. 여기에 1925년 6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이 실시되고이듬해 6 . 10만세운동꿇계획하다발 각되어 타격을 입은 사회주의 진영이 세력만회를 위해 350여개 사장단체들을 조선공산당의 표면단체인 정우회政友會와 서울청년회의 사장단체인 전진회前 進會로해체통합하고정우회선언(1926. 11. 5)을통해 민족주의 진영과의 민족협 제4편 I 3 · 1운동 이후의 국내외 독립운동 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