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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일본인 수는 계속 증가하여 1922년에 2,304명으로 2천 맹을 넘어섰다. 1930년에는 3,577명, 2년 후인 1932년에는4,309명을 기록하고 있으며, 1934년 에는 5천 명을 넘어섰으며, 1935년에는 5,984명에 달할정도였다. 고양군민 가 운데 일본인의 비중은 1911∼1912년에는 전체인구의 0.2∼0.3%에 불과했으나, 1917년에는 1.3%를 점하였다. 이후 일본인의 비중은 계속 증가하여 1931년에 이르러서는 2%를 치-지했으며, 1935년까지 증가 추세가 지속되았다. 그러다가 1936년에는 1%대로그 비중이 낮아졌다. 1936년 이후 일본인의 비중 약회는 용 강 • 연희 • 한지 3개 면이 서울로 편입되어 고양에서 떨어져 나간 것과 관련이 있을것이다_3) 또한고양군에는 비중은 작지만 중국인과 서구인들도 거주하고 있었다. 중 국인과 서구인 인구는 꾸준히 늘어나, 1935년에는 중국인 539명, 서구인 퉁이 53명에 달하였다. 그러나구역조정이 단행된 1936년도에는중국인만 70여 명 이 고양군에 있었을 뿐 서구인은 한 명도 거주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1914∼1936년 간 진행된 중국인과 서구인의 인구증가는 대부분 후에 서 울로편입된지역에거주했던인구로보아야할것이다 _4) 고양군청은 일제시대 중반까지 지금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1가에 위치해 있었다가, 1936년 용강면 • 연희면 • 한지면이 한성부로 편입되면서는 서울특별시 중구을지로6가 18번지에 자리하였다. 그후 1961년 원당면 주교 리 97의 1번지(현 주교통600번지)에 군청 건물을 신축하였고, 1963년 3월 군청 청사를 이곳으로 이전했다, 3) 고양시사편찬위원회, 『고양시사』 1;역사, 2005,418쪽 4) 위와 같음‘ 들어가눈 말 고양이라는 곳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