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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서울에서옹몇몇 기마헌병들이 시위와만세를멈추고해산하라고했습니다 군 중들은 그의 말에 따파 시위를 해산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날은 이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닷새 후 서울에서 온 여러 명의 헌병들이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집주인들이 닷새 전 시위에 참여하여 ‘만세‘를외쳤는지 조사했습니다. 이 사랍 은만세를불렀다고시인하면서헌병이요구한대로시위를해산하고집으로돌아갔다 고말했습니다. 이러딴조사를마친후이 남자를비롯한많은사립들이 체포되어서울 로끌려갔습니다. 그씌 말에 따르면그와체포된다론사림들은감옥이 아닌정부장관 의 사무실에 불려 가 채찍질을 당했다고합니다. 상처투성이인 그의 몸올 직접 보았습 니다 그는60대의 채찍질을당했는데 30대는 12시에, 30대는 2시에 맞았다고합니다 다른사람들도그와깜은방식으로맞았습니다. 그는현재 치료를기다리며 병원에 입 원중입니다. 다음젊은이들은정확히동일한증언을한사랍들입니다. (5) 정홍봉(Chung Hung p。ng), 16살. : (6) 이천세(% Chun 싫i), 21살. I <7) 장오상(Chang Oe Sang), 24 살58) 일제의보복과고양 4월초에 들어 전곽의 시위상황은 더욱 고조되고 격렬화되었음-에도 고양군 만세시위는 3월 말로 일단락되었다. 일제는 ‘ 고양군 일산 지방에서는 소요 발 발이래검거 처벌한자가 198명에 미쳤으나그후장래에는‘망동’을하지 않는 다는서약을쓴자가많아민심은완전히전대로복구되(었다).”고선언했다. 이 보고서는 고양군 일산지역에서만 만세시위로 일제가 투옥, 고문, 태형 퉁으로 처벌을가한자가 198명에 이르렀다. 판결문이나다른기록에 나타나지 않은 피해자들이 더 많이 있음을 말해 준다. 1919년 4월 19일 고양군 일산 주재소의 헌병 상등병이 전근을 가게 되었다. 그러자 일산의 ‘유력자’ 쪽에서 “꼭 회식을 같이 하고 간담을 나누고 싶다.”는 뭇을헌병주재소에 전해 왔다. 이렇게하여 면장(중면연장으로추정) 이하지역 사회 ‘유력자’ 20명과 일본인 5명이 회식을 한자리에서 ‘유력자’들이 한 말을 일 제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58) 위의 책, 375∼376쪽 제3팬 13. 1독립운동 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