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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에 모여 비밀회합달 거듭한 결과 장로교에서는 정주의 이숭훈 • 김병조 • 이 명룡, 평양의 길선주, 선천의 양전백, 의주의 유여대, 서울의 이갑성, 감리교에 서는평양의 신홍식, 서울의 이필주 • 박희도 • 신석구 • 오화영 • 김칭준, 원산 의 정춘수, 해주의 최성모, 기독교신보사의 박동완으로 하여 장르르교 • 감리교 협해 16인을 선정하였다. 불교계에서는한용운과백용성 2명이 선정되었다. 그밖에도운동의 준비과 정에 참여했던 인물 중에서 자금을 담당했던 천도교의 박인호 • 노헌용, 천도 교와의 연대과정에서 이숭훈과 더불어 기독교제의 대표로서 활약했던 함태영, 수원의 김세환 동은 후속적인 일을 위해 민족대표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 한 인물까지 포함해 민족대표 48인이라고 하기도 한다. 2월 27일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 사택에서 열린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민족 대표간에 선언서에 누구 이름을 앞에 올리느냐는문제로논쟁이 벌어지고 있 었다 종교간, 인물간위상과지존심이걸린문제라쉽사리타협을보지못하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들어오면서 이 문제로왈기월부하고 있는것을들은 이승 훈선생이 소리쳤다. “순서는무슨순서야,죽는순서야! 천도교손=병희 선생을 제1번으로 하고, 장로교 길선주 목사, 감리교 이필주 목사와 불교의 백용성 스 님을그 다음으로 한다음, 나머지는가나다순서로하세요.” 히는 바람에 간단 하게해결되었다. 이필주 목사는 민략대표 중에 감리회 대표로 손병희 천도교 대도주, 길선주 목사에 이어 세 번째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거사가다가오면서 이필주목사의 사택은 연일 학생단의 회의장소로시용되 었다. 2월 28일에도 짝생 대표들이 이필주 목사사택에 모여 다음날 탑골공원 에서 있을 독립선언식에 학생들의 동원 책임을 점검하였다 , 이필주 목사 사택 에 함께 기거하고 있었던고양은평면의 고은교당高恩敎할 전도사이며 연희전 문학생 이병주李秉周(당시 29세)는정통교회 사무실에서 「비법행통」 및「조선국 민학생단 발동」이라 는 유인물을 작성, 퉁사했다. 그는 이 유인물을 배포하다 붙잡혔다11) 학생단은 3월 1일 이후에도 연속적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한다는 계획을 이필주 목사사택에서 의논 하였다. 제3편 13 . 1독립운동 z。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