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page

4년간고통과방황의 나 3 1운동의 준비 잠j;가 된 이필주목사의 정동교회 날을 보내고 있던 그는 1890 년 봄 친구익 권유로구한국 군대에 사병으로 입대하게 되었다‘ 군입대는 그에게 활로가 되었다. 졸병 월급 이었지만매월 최소한의 생 활을유지할수있게 되었 다. 그는군대 규칙을잘지 2。4 키고 기예운동에도남달리 노력하여 시험 때마다승급하여 말단사병에서 하사 관급의 참교參校(저금의 분대장)로 승진하였고, 얼마 후 시위대까 창설될 때, 다 시 부교副校로 승낀하여 하급지휘관이 되었다. 구한국군대사병으로근무하던중 1894년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다. 농민군 진압에 동원된 그는 전라도 전주, 완산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퍼나 군인으로서 적이 아닌 동족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어야 한다는 현실에 괴효L워했다 나라는 청국과일본, 러시아사이에서 이리저리 흔들렸고,군대는신식과구식의 혼합 친위군에서 일본식 교도중대, 훈련대, 러시아식 시위대로바뀌어 그에게 번민을 안겨주었다. 그는 다시 술과 씨움박질을 하며 옛날 버릇으로 되돌아갔다. 1897년당시로서는늦은 28세 나이로김해 김씨 인숙仁淑 여사와결혼하였다. 5년여 동안자식 납매를낳아단란한가정을꾸리면서 위로와 안정을 찾았다. 그러던 1902년전염병으로갑자기 두자녀를잃게 되었다. 깊은슬픔과 좌절 감에 빠져 자신의 죄값 때문이라고자책했다. 번민하던그 때 기독교에 대한 이 야기를듣고남대문안상동교회를찾。p,J:다. 1년동안생각없이 교회에 다니딘 중 어느 날꿈을 꾸었다. 그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꿈에 내가 죽어서 시체를 입관하여 놓고 내가 시체를 향하여 말하기를‘ 네가 네 죄로 띤하여 이같이 죽었느니라하고 비감한 말을 하다가 잠을깨 었다 그때부터 나는주색잡기를온전히 끊어버리고 아직 담배만은끊지 않 고양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