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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의 본질을 3 · 1운동 이전에 극명하게 드러냈다. ‘내선일체’와 ‘일시동인’ 은 구호에 그치고 필요하면 언제든지 한국인을 희생의 도구로 삼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 일은사람들이 먹고사는 데 직결된 쌀의 문제에서 나타났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전쟁 특수경기 때문에 최고로 혜 택을받은나라가되었다 . 전쟁은주로유럽에서 벌어졌고,시장유례없는 대규 모 인적 · 물적 동원전이 전개되었다. 군수품 · 민수품을 기리지 않고 물자는 귀해졌고, 가격은 폭동했다. 연힐댁의 일원인 일본의 공장들에 영국과 프랑스 둥 유럽 동맹국들로부터 주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공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아갔으며, 배들은 유럽으로상품을 실어 나르기 바쨌다. 깨항이후 만성적인 적자에 허덕여 왔던일본은일약혹자국이 되었다. 일본국내에 돈이 넘쳐났다. 돈을 번 부자들은 쌀에 투 자하여 쌀을 매점하기 시작하자 쌀값이 폭둥했다. 1917년도 전반기에 정미해米 가격은 한 섬E에 14∼15원대였는데, 쌀값은 계 속올라갔다. 그 해 5월 『매일신보』에서 ·‘쌀값이 너무올라못살겠소.” 하는 일반의 부르짖음이 보도되기 시작하였다. 전반적으로 물가기- 치솟는 가운데, 쌀값까지 계속오쿄니 임금근로지들이나영세업자들은죽을지경이었다 그 이전부터 쌀값 퉁귀가 시작되면서 식민지 체제에 대한 한국 민중들의 이 글거리는 분노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1917년 8월 진라남도 영광군 영광면비석둥리의주민들은관 내의 쌀을일본으로유출하그 l 자각항구로빼내 어 가던 무옥상쉴썼商(쌀을 무역히는상인)을 밟아죽이려고 했다. 며칠 후 시홍군 신동면잠실리에서 일본인 농민들과조선인사이에 분쟁이 일아나니중에는큰 씨움이 되어 쌍방간에 여러 명의 부장자가 발생하였다. 1917년 11월 29일 강원도 이천 · 평강에서는 주민 45명이 소요를 일으켜 진 압 경관에게 맹렬히 저항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진압경관이 일제 사격을 가해 서 3명이 죽고 나머지 전부가체포되었다 이들은처음화전민 4가구에 세금을 받으려는 이장과 때립하다가 평강군 대민리 주민의 통조를 받(까그 수효가 약 40명에 이르는집딴 을 형성하고 백포의 기치를앞세우고낫과몫퉁이로무 장하 고대항했다. 1918년 3월 13일 강원도 철원군 바장면 석교리 주민 수백 멍이 면장 이보헌李 190 고양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