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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 관리에 임명된 미국인으로 1884년갑신정변사후처리와손해배상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일본외상이 내한했을때함께 한국에들어왔다. 1904년8월제1 차한일협약이 체결되자 일본의 천거로대한제국외교고문에 임병된 스티븐스 는 러일전쟁 이후 미국 조야에서 거세게 일고 있는 반일감정을 진정시키고 한 인 교민사회에 만연하고 있는배일감정을 무마하기 위해서 일제에 사주를 받고 워성턴으로특파되썼다 1908년 3월 20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스티븐스가 “일본의 한국지배는 한 국에게 유익하다.년1는 친일성명서를 발표했다. 한국교민사회눈 격분하였다. 즉각 센프란시스코공립회관에 모인 교포들은 스티븐스에게 항꾀할 것을 결의 하고 그가 묵고있는 페어몬트 호텔로 가서 친일성명을 취소할 껏을 요구하였 다. 그러나스티븐스는오히려 • 한국에는 이완용李完用같은 충신이 있고, 이토 히로부미伊腦뺨文 같은 통감이 있으니 이는 한국의 행복이요 동양의 큰 행복이 라. 내가 한국 형편윤 보니 태황제는 실덕失德이 매우 심하고 백성은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으니 만일 일본이 한국 을 차지하지 아니했더라면 벌써 러시아가 차지했을 것이다.”라고 망언을 하였다 격분한한인들은스티븐스를집단구타하 고 돌아와 대책을 논의했다. 장인환, 전명 운 의사가 나서 스티븐스를 처단하기로 하였다. 3월 23일 아침 일찍부터 샌프란시스코 대동보국회 회원엔 장인환꿇仁煥(1876∼ 1930)과 공립협회 회원인 전명운田明雲 (1884∼1947)은 오클랜드 도선대합소에서 스티븐스를 기다렸다 워싱턴 행 대륙 횡 단열차를 타기 위히여 일본 총영사 고이 케小池張造와 함께 스티븐스가 차에서 내 리자마자 먼저 전명운이 손수건으로감싼 의열투쟁의 불을 당긴 전명운과 장인환 1908년 제2편 | 국권회복운동 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