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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적인 탄압에 나서게 되었다. 일제는 북부수비관구(경성, 회령, 북청, 함홍, 원산, 강릉, 개성, 평양), 납부수 비 관구(대전, 조치원, 대구, 전주)로나누어주력부대주둔시키고관하각처에 병력 을분산배치했으며 또한헌병조직을의병전열에 따라배치하였다. 고양은북 부수비관구에 해당되며 고양의병 탄압을 위한 일본 헌병의 병력을 경성, 즉 서 울에 주력부대가 배치되었다. 그리하여 1909년 9월부터 10월 30일까지 2개월 간남원을 기점으로고홍, 굉주, 영광등지의 의병을토벌하는데 대규모병력을 동원하였다 일제는주력부대였던 임시한국파견대의 수비대 병력 이외에도 경찰 • 헌병 대 병력을 모두 똥원하여 군경 합동으로 탄압작전을 전개하고 면장과 이장 둥 말단지방행정조직까지최대한동원하여의병의근거지가될만한촌락과가옥 을닥치는대로방화하고의병을지원했다는명목으로민간인들을살육하여 초 토화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황현의 『매천야록 』에 의하면 당시 일본군의 토 벌 만행에 대해 “사방을그물 치듯해놓고순사를파견하여 촌락을 수색하고 집 집미-다 뒤져서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죽였다. 그래서 행인의 발길이 끊기 고 이웃과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의병들은 삼삼오오 도멍하껴 흩어졌으나 폼 을 감출 곳이 없어 돌출하여 싸워 죽었고, '4' 자는 도밍 L 하다가 칼을 맞았다 . “라 고당시의 참혹한광경을기록하고있다. 대토벌작전이 끝난후에도일제는양반과유생 또는기타지방의유지를앞 세워 지방민을 회유하는 한편, 대토별 기간중 살아남은 의병들에 대해서는 순 일본군에 총살당하는 의병들 148 고양 독립운동사 창 둥지를 중심으로 한 수차례 에 걸친 토벌월 속행하여 1909 년 말에 이르러는 호남지역 의 병세력은 거의 와해되었다 토 벌작전의 후속조치로 귀순하거 나체포한의병중일부에 대해 서는 기소유예의 처분을 내리 고전라남도해안일대의 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