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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1909년봄본격적인준비에 들어갔다. 그것은일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으 면서 국내 진공이 기까}편리한만주일대에 부지를정하고신민회 조직을통해 비 밀리에 모금한돈으로토지를구입한다. 애국적 인사들과 청년들을 계획적으로 집단이주시켜 신한민촌을 건설한다. 한편으로는토지를개간, 농염을 경영하여 경제적인 자립을 도모하며, 디른 한편에서는무관학교를 세워 독렵운동의 군사 지도자를 양성한다. 무관학교졸업생과 이주해 오는 애국청년들로독립군 을 창 설한다. 이렇게 독립군을 OJ: 성하여 절호의 기회가오면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내 를해방한다고하는전략적구상이었다. 절호의 기회란언젠가일본의 침략야욕 으로중일전쟁과 미일전쟁으로 일어나면 대일항전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한편 신민회는민족산업 진흥을위해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 · 협성동사協成 同事 • 상무통사商移同편 • 조선실업회사 안악 소방직공장小統織工楊 • 연초공 장 • 사리원 모범농환둥을설립하였다. 또한조선광문회때뺀光文햄를설립하여 민족문화와역사 를꽁부할고전을출판했으며 이런도서를보급하기위해 평 양에 태극서관太極꼽館, 안악에 면학서포젠댈과1;rli를설립하였다. 계몽강연과학 회 활동을통해 애국심에 기초한 민권사상 • 신지식을 전파하고 선산업 진홍의 계몽, 구습타파퉁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 그러나곧 이같은 구국운동에 대해 일 제는좌시하지 않고 단속이 가하였다. 1910년 신민회는 만주일대를 답사하며 그해 12월부터 비밀리에 독립군기지 건설을위한단체 이주를시작하였다. 신민회는 1911년봄에 대대적인 이주를 실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움직임을 포착하고, 1911년 1월에 ‘안악사건‘과 ‘양기탁둥보안법위반사건‘ 둥을조작하여 신민회 뚱앙본부와 황 해도지회 회원 160여 명을 체포하였다. 1911년 9월에는 소위 ‘데려우치총독 암 살미수’ 사건을 날조하여 신민회 평안남북도지회와 황해도퉁서북지역 회원 을비롯하여전국의 애국계몽운동가약 700명을체포하였다. 이러한난관에도불구하고국외로이주한신민회 회원들과 애국계몽운동가 들은 1911년 봄 만주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에 교민단체로서 경학사차學社와 신 홍강습소(후에신홍무관학교로발전)를설립했다.그후 1913년에는왕청현나자 구羅子構에 동림무관학교束林武官學校, 밀산현 봉밀산자에 밀산무관학교密山武官 제2편 | 국권회복운동 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