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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싸워 1명이 사망하였다. 12월 2일, 고양군 북방 60리 되는 곳에서 의병 20여 명이 고양 헌병분견소의 일본 헌병 · 보조원과 총격전을 벌였다_--18) 12월 6일, 의병 약 20명이 고양 의 헌 병 및보조원과교전을벌였다 당시 일제 헌병의 교전결과보꼬서에 의하면의 병들이 --궤멸되았다 .. 할 정도로 의병측은 큰 피해를 입었다·) 1908년한해가격동과소요속에서저물어갔다. 12월에 들씨고양 • 수원 • 용인 · 광주 · 포첸 · 마전 · 연천군과황해도평산 · 연안동깎지의 의병이 전 보다더 자주 출몰하고그수효도전보다더 증가되었다. 일본군과 의병의 충돌 이 계속되자군민들의 생활은불안할수밖에 없기도하였다. 이에고양군수최 홍석은 각촌으로 다니며 자기 월급을 털어 피해 기족을 도왔다는 신문기사도 있다 _ 50) 1909년 들어와 의병들에 대한 일본군의 탄입L이 가속화되었-c+. 1월 31일 고양 동방 S im 지점 에서 12명의 의병들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타책을 입고 물러났 다. 51) 4월 19일에는고양동북방 약 16ki끼 지점에서 의병 20여병과 일본군 헌병 대가 교전하였다고 한다. 52) 고양군 지역에서 활동했던 의병부대는 심성완 • 박래봉 • 박순근 • 연기 홍 · 유춘열 · 이곤칠 • 허위 • 안두식53) . 안익선 · 황재호부때였다. 그 외에 도 의병장 한창캘 • 신병재 • 홍금철 · 천응식 • 안훈 • 김명희 의병부대의 부 히들이 고양헌병분견소에 귀순하고 있는점으로 미루어보면, 고양군 일대에서 냐8) r대한매일신보』 ‘ 1908. 12. 2'1. •9) 「기수 제3082호 한국 각지에서의 적의 상횡에 관한 한국주치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1908. 12. 15, 국사편찬위원회, r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1 , 159쪽 50) 『대한매일신보』 ' 1909. 2. 7. 51) 「기수 제'105호 한국 각지에서의 적의 상황에 관한 한국주차군 사령관씌 보고 이첩의 건」, 1909. 2. 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1‘ 159쪽 52) 「기수제1300호한국각지에서의 적의 상횡에 관한한국주차군사령관의 보고이첩의 건」 , 1909. 5. 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시-』 자료 11, 159쪽 53) 안두식은 서울사직동출신으로해산된 군인 참교參앉로 있다, 1908년 1띔 15일 경 의병장 연 기호延샘의 부하로들어가별무관~l)fjj’셔이 되어 활약했으며, 스스로 30여 명의 부하를거느 리고 서울과 고양군 · 양주군 일대에서 일본 경찰과 군대의 움직임을 정찰 • 보고하는 임무 를수행하다유형 10년을 받았디{국가보훈처‘ 「독립운동자공적자료」). 134 고양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