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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자혜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의 부인이다. 박자혜는 조선총독부 부속병원의 조산원(助産員)으로 근무하던 중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필주(李弼柱)목사와 연락을 취하며 동 병원의 조산원과 간호원들로 조직된 간우회(看友會)의 회원들을 규합하여 비밀리에 각종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또한 동년 3월 10일 간우회원들을 주도하여 독립만세시위운동을 폈다. 박자혜는 동년 3월 동 병원에의 동료들과 김형익(金衡翼)등의 한국인 의사를 규합하고 시내 국·공립병원 직원들의 동조를 얻어 태업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1920년 동 병원에서 근무하던 김용채(金容採) 등 3명의 의사가 사직하자 박자혜는 더 이상 일제를 위해 일할 수 없다는 각오 하에 병원을 그만두고 중국 길림성(吉林省)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신채호와 결혼한 박자혜는 이후 남편을 따라 각지를 전전하면서 온갖 고통과 역경 속에서도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1924년 신채호가 일경에 붙잡혀 대련(大連)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게 되자 박자혜는 북경(北京)·천진(天津) 등지의 독립운동가와 국내인사들과의 연락임무를 띠고 귀국하였다. 1926년 12월 나석주(羅錫疇) 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의거 당시 사전에 위치·지리를 안내하는 등 독립지사들간의 연락과 편의제공에 힘을 쏟았다. 이와 같은 활동을 펴면서 박자혜는 일경의 끊임없는 감시 속에 수없이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박자혜는 신채호가 여순(旅順) 감옥에서 순국한 후 병을 얻어 1944년 10월 10일 영면하였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