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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영(申德永)은 서울사람이다. 1914년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귀국후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다. 1920년 7월경 노형규(盧衡奎)·노석중(盧錫中) 등과 만나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의하고 부한청년단(扶韓靑年團)을 조직하여 이에 필요한 자금 모집을 위해 지방 부호에게서 군자금을 갹출하고자 하였다. 그 수단으로서 동월 18일 서울에서 대동단 총재 김가진(金嘉鎭)의 명의로 포고문을 만들어 전라남도 광주 본촌면 일곡리(本村面日谷里) 노종료 등 광주의 부호들에게 각각 우송시켜 출금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광주에 내려가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1921년 5월 3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받고,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러던 중, 1923년 5월 병으로 가출옥하여 세브란스병원에서 가료 중 탈출하여 중국으로 건너갔다. 1927년에는 최양옥(崔養玉)·안창남(安昌男)·김정련(金正連) 등과 함께 중국 산서성 태원부(山西省太原府)에서 공명단(共鳴團)을 조직하고 북만에서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비행학교 설립을 계획하였다. 이에 자금모집을 위하여 최양옥·김정련을 국내에 파견하였으나 양인이 체포됨에 따라 계획을 중지하게 되었으며, 그는 하얼빈(哈爾濱)에서 계속 지하활동을 벌이던 중 1932년 6월에 다시 체포되어 나머지 형기를 대전감옥에서 보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