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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익,노상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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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익(1849.11.12~1941.9.16) 대통령표창(2017) 단장읍 무릉리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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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직(1855.11.21~1931.1.30) 건국포장(2003) 단장읍 무릉리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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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눌 선생은 1855년 김해의 한림면 금곡리에서 극재 노필연을 부친으로, 내눌 노상익에 이어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치팔, 호는 소눌,자암병수, 눌인이다. 선생은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안효제, 노상익, 이승희, 장성역, 이건승을 비롯한 우국지사들과 동족을 지도하며 국권회복의 방도를 모색하였다. 그러한 중에 망명객 다수가 '망국의 후학을 지도할 이는 그대뿐이다.'라는 중론을 수용하여 2년여의 망명생활을 뒤로하고 귀국하였다. 밀양 단장면에서 사연서장과 자암서당을 열어 많은 탁재와 현재를 배출하였다. 1919년에는 파리장서에 문제자 13인과 함께 서명하였다. 선생은 파리장서 서명이후 밀양 영남루 곁의 헌병대에 구금되어 고초를 겪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선생은 이세 유림의 종장이었다. 세의가 평평고절하였으며, 세유가 의덕을 존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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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눌 선생은 1855년 김해의 한림면 금곡리에서 극재 노필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884년에 대과에 급제하고 정언, 시강을 지냈다. 을사늑약의 기미가 있자 상소를 올리고 사직했다. 1906년 이등박문이 부산에 올때, 일제는 선생을 요주의 인물로 지목하여 밀양헌병대 영남루 소재에 구금하였다. 이후 은사금 거절로 다시 구금되었다. 선생은 1910년 한일합방을 듣고 자결하여 목을 맸으나 실패하고 이듬해 만주로 망명했다. 만조로 망명한 선생은 안효제, 예대희, 안창제, 이건승,조장규등과 함께 안동현 접리수 서구에 한인촌을 조성하고, 이주 한일들을 수용하였으며, 그들의 권익보호및 생활향상과 교육에 힘썼다. 1913년 11월 한일공교회 창립등에 참여하여 공자학을 드높이며, 민족정기를 세우는 교육사업을 벌였다. 또한 주요 한일들과 교류하며 독립의지 고양과 민족문화 확립에 노력하였다. 이때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군자금 마련을 병행함에 총독부에서 눈치채고 요시찰 인물로 지정하고는 1914년부터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순사가 감시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1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