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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윤 (당시35세)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1968년 서울 출생 1987년 6월항쟁 관련 시위로 구속 1988년 남북공동올림픽개최요구 시위로 구속 1992년 한국빠이롯트만년필 입사, 노민추 활동 1995년 대명정밀 입사 1996년 노동자생활문화공동체 '모듬살이' 회장 1996년 광명인쇄 입사, 인쇄노조 가입 1997년 민주노총 서울본부 중동부지구협 사무차장 1998년 민주노동당 가입, 당원번호 61번 1998년 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부장 2000년 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국장 2002년 민주노총 서울본부 사무처장 2004년12월30일 운명 |244|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신자유주의시기 노동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68년생으로 37세의 짧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일찍이 청년노동자였던 ’87년 20살 나이에 6월항쟁 관련 시위로 구속되면서 이후 단 한 번의 휴식도 없 는 긴 노동운동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88년 남북공동올림픽개최요구 시위로 두 번째 구속이 되었고, ’92년부터는 한 국빠이롯트만년필에 입사하여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 활동을 전개하였다. ’95년 대명정밀에 입사하였고, ’96년에는 노동자생활문화공동체 '모듬살이' 회장을 맡 아 활동하였다. ’96년 광명인쇄에 입사하면서 인쇄노조에 가입하였고, ’95년 민 주노총의 건설과 ’96년 민주노총 서울본부의 창립 직후인 ’97년부터 민주노총 서 울본부 중동부지구협 사무차장으로 활동하였다. 민주노동당의 전신인 국민승리 21과 ’97년 대선투쟁을 전개하였고, ’98년 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부장, ’00년 민 주노총 서울본부 조직국장으로 서울지역 민주노조운동 조직과 투쟁의 최일선에 서 활동하였다. 동지는 민주노총 서울본부 6개 지구협의회 건설과 서울지역 장 기투쟁사업장 지원 투쟁에 헌신적으로 결합하였으며, ’99년부터 본격화된 비정 규∙미조직 노동자 조직과 투쟁을 통해 상용직, 재능교사, 학습지, 보험모집인, 서울대시설관리, 한국통신계약직, 방송사비정규, 동부시장, 서울지역중소기업일 반노조, 덤프연대 등 수많은 미조직∙비정규노동자들의 조직과 투쟁에 헌신해왔 다. ’02년 민주노총 서울본부 사무처장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04년 12월 30일 운명하게 될 때까지 쉼없는 활동으로 인해 5년째 내리 건강악화를 의미하는 빨간건강신호등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했다. 가정에서의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여 늘 식구들에게 미안해했다.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에서 사람을 중심에 놓지 않고 분열하는 모습을 참으로 안타까워했다. 이렇듯 자신을 돌보지 않고 운동에 헌신하던 동지는 참으로 따뜻한 사람이었 다. 자신이 짊어진 천만근 삶의 무게는 고스란히 숨긴 채, 동료와 후배들 가슴 속 티끌 같은 투정까지 밤을 새며 들어주던 미련하리만큼 살가운 사람이었다. 또한 싸움에 나서면 물러설 줄 몰랐고, 어느 때 어떤 투쟁이 필요한지 누구보다 먼저 고민했다. 제 몸 돌보지 않는 헌신적인 조직활동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을 한 깃발 아래 묶어세웠고, 나태와 일상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향한 채찍질 멈출 줄 모르는 치열한 사람이었다. 끝내살리라 |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