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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으로 ‘광주대단지 조성 계획’ 을 입안하였고, 1971년 선거에서의 공약사례는 많 은 빈민들을 대단지로 끌어틀였다. 그로 인해 광주대단지의 인구는 급속히 늘었고 땅값은 폭등했다. 한편 서울시는 전매 행위를 막겠다는 명분 아래 매각된 토지를 기한 내에 구입하지 않으면 해약은 물론 6월 이하 징 역과 벌금을 부과하겠다고 위 협했다. 서울시의 이런 일방적 행정 행위에 항거하여 1971년 7월 19일 경기도 광주군(현 성남시) 개발 지 역 주민들이 광주대단지 제일교회(현 성남교회) 전성천 목사와 박진하 장로를 각각 고문과 위원장으로 선임하여 ‘분양지 매각가격 시정위원회’ 를 결성 하였다. 중앙대책위원회는 대지 가격 평당 1500원 이하로 인하, 매각 가격 10년간 분할 상 환, 5년간 각종 세금 면제, 구호 대책 마련 등을 요구했으나 서울시와 경기도가 모 두냉담한반응을보이자 ‘분양지매각가격시정위원회’를 ‘투쟁위원회’ 로전환하 였다. 결국 8월 10일 3만 명이 념는 주민들에 의한 군중집회가 열린 날 투쟁위원회 와 양택식 서울시장은 구호양곡 확보, 생활 보호 자금 지급, 도로 확장, 공장 건설, 시민 자치운동의 시발점 광주 대단지 사건(1971) 제2펀-공정사회를위한실천,시민사회 활통 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