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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과 긴밀한 연락을 취고 안동현에서 성락규 조성환선생에게 인도 총독 암살과 군자금 모금의 임무를 지령 입국 활동케하였다. 선생은 서울 이태의 선생 외 유림과 면암 최익현 의암 유인석 연재 송병준 선생의 사당 삼현묘를 건립코저 전국 유림의 규합운동을 전개하여 항일 및 독립정신을 고취하였으며 왜헌의 탄압으로 중단은 되였으나 유림계는 물론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남기셨다. 선생은 서기 1918년 6월 불행하게도 국권회복운동 주모자로 왜헌에게 체포되시어 해주형무소에서 옥고 10년을 치르시면서도 잔인무도한 고문과 치욕 속에서 의지를 굽히시지 않았으며 출옥하신 후에도 국내외 독립지사 및 유림과 내통 독립정신을 고취 광복운동을 계속하던 중 조국광복을 맞이했다. 선생은 신생 민주국가 건설에 앞장스셨으며 한국광복의용군 총사령 대한무관학교 최고 고문 및 국민협의회장 등을 역임하시었으며 이시영 조성환 선생과 국가의 간성이 되는 대한무관학교를 설립하고저 건국협진회를 조직하고 사학연구회를 설립하시는 등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분투하시다가 서기 1952년 3월 향년 6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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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광복운동은 본래 비밀리에 이루어졌던 관계로 그 공적을 다 살피지 못하는 마음 애석할 뿐이며 선생의 광복운동은 기미3.1운동에 효시가 되고 항일투쟁은 광복의 저력이 되였으니 선생의 높은 충의와 대절은 자주와 자유를 갈망하는 이 민족 불굴의 표상이며 인류정의 규현으로서 숭고한 애국충절의 뜻을 남기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우노라. 서기 1981년 6월 일 천안시장 김홍식 세움, 김녕인 김진상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