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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 이관구선생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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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한산이씨로 고려조 명현이신 한산부원군 문정공 목은 색 선생의 20대손이시며 휘는 관구요 호는 화사이시다. 선생은 서기 1884년 황해도 공화에서 탄생하시고 배 함양여씨간에서 2남 3녀를 두시고 굽히지 않는 기개에 천품이 총명강직하심이 범인을 넘으시었다. 선생은 서기 1906년부터 동 10년까지 평양대성학교 및 숭실대학교 재학 시 거물 항일지도자이신 윤치호 안창호 선생으로부터 국권회복 확립에 관한 강의와 애국사상을 공고히 하는 교습 중 치욕적인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장래 국권회복을 하고저 그 운동을 중국의 북경 남경 상해 및 서간도 노령 등지를 순방하시며 동지 규합 및 국권회복 운동에 소요되는 金穀(금곡) 모집운동을 하시였으며 상해에 양기택 신채호 이동녕 선생 외 수백 동지와 동제사란 비밀결사를 조직활동하시고 서간도에 망명 중이신 이시영 선생과 무관학교 설립에 공헌이 지대하시였다. 선생은 서기 1914년에 이근석 변동환 선생과 황해도 독립군단을 조직하시여 해주 석담에서 의거하시고 평안도 및 서북간도의 중진 의사들과 모의 개문을 당시 조선총독에게 발송하군과 긴밀한 연락을 취고 안동현에서 성락규 조성환선생에게 인도 총독 암살과 군자금 모금의 임무를 지령 입국 활동케하였다. 선생은 서울 이태의 선생 외 유림과 면암 최익현 의암 유인석 연재 송병준 선생의 사당 삼현묘를 건립코저 전국 유림의 규합운동을 전개하여 항일 및 독립정신을 고취하였으며 왜헌의 탄압으로 중단은 되였으나 유림계는 물론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남기셨다. 선생은 서기 1918년 6월 불행하게도 국권회복운동 주모자로 왜헌에게 체포되시어 해주형무소에서 옥고 10년을 치르시면서도 잔인무도한 고문과 치욕 속에서 의지를 굽히시지 않았으며 출옥하신 후에도 국내외 독립지사 및 유림과 내통 독립정신을 고취 광복운동을 계속하던 중 조국광복을 맞이했다. 선생은 신생 민주국가 건설에 앞장스셨으며 한국광복의용군 총사령 대한무관학교 최고 고문 및 국민협의회장 등을 역임하시었으며 이시영 조성환 선생과 국가의 간성이 되는 대한무관학교를 설립하고저 건국협진회를 조직하고 사학연구회를 설립하시는 등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분투하시다가 서기 1952년 3월 향년 6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치시다. 선생의 광복운동은 본래 비밀리에 이루어졌던 관계로 그 공적을 다 살피지 못하는 마음 애석할 뿐이며 선생의 광복운동은 기미3.1운동에 효시가 되고 항일투쟁은 광복의 저력이 되였으니 선생의 높은 충의와 대절은 자주와 자유를 갈망하는 이 민족 불굴의 표상이며 인류정의 규현으로서 숭고한 애국충절의 뜻을 남기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우노라. 1981년 6월 천안시장 김홍식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