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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은 왜 학살되었을까? 간토대학살 당시 죽음을 맞은 것은 조선인 뿐만이 아니었다. 이주노동자로 일하던 중국인들도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이 주로 생활하던 '오지마 3초메'는 학살 장소가 되었다. 이 곳에는 중국인 노동자들의 권리옹호를 위한 '교일공제회(僑日共済会)'가 있었다. 간토 대지진에 앞서 중국인들이 일으킨 노동쟁의를 비롯한 노동 현장에서의 갈등은 중국인 학살의 씨앗이었다. 9월 3일, 중국인 이주노동자들 300~400명이 오지마마치(大島町)부근에서 계엄군, 경찰, 자경단에 의해 학살당했으며, 9월 12일에는 교일공제회의 회장이자 재일중국인 사회의 지도자였던 왕희천이 나라시노(習志野)로 향하는 사카사이(逆井) 다리 옆에서 군인들에게 학살된 후, 난도질 당하여 나카가와 강에 던져졌다. 기록에 따르면 계엄군과 경찰, 그리고 일본 자경단에 의해 750명의 중국인들이 학살되었다. 그러나 명단에 없는 학살피해자까지 합치면 8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