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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하였다. 어려서 가학을 익히고 자라서는 임재 서찬규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이 크게 성취하였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분연히 일어나 백방으로 국권회복을 도모하였다. 1915년 1월 윤상태 박상진 서상일 이시영 등과 비밀리에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하여 활약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온갖 수모를 당하고 1917년 7월 군자금 모집에 연루되어 3개월간 구류당하고 1919년 3월 독립운동이 고조되자 유림대표 곽종석 김복한 등이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게 됨에 공은 달성지역을 책임 맡아 적극 협력하여 친족 우성동 우찬기 우경동 우승기 등과 서명하였다가 6개월간의 옥고를 치루었다. 공의 일생은 실로 형극의 연속이었다. 거듭된 투옥에서는 일경이 악랄한 고문에 시달려야했고 방면되어서는 끊임없는 감시로 구속받아야 했다. 그러나 공은 끝내 굴함이 없이 의연한 지사의 모습으로 일관하였으나 마침내 일경의 악형이 병인이 되어 1941년 2월 20일 조국광복을 보시지 못한 채 통한의 일생을 마쳤으니 향년이 69재이었다. 묘는 대구 달서구 대곡 선영하 건좌원이다. 배는 옥천김씨이니 석수의 따님으로 부덕이 있었다. 묘는 공묘에 부장되었다. 1남 3녀를 두었으니 남은 영기이고 3녀는 이원석(경석) 서철수 이인희에게 각각 출가하였가. 영기의 자는 성이(종성) 종선이요, 이원석(경석)의 자는 진정 갑진이요, 서철수의 자는 정보요, 이인희의 자는 재유요. 성이(종성)의 자는 창원이요, 종선의 자는 주형이다. 광복 후 정부에서 공의 항일 훈업을 포상하여 국민훈장 애족장을 내렸으니 의당한 일이다. 외손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