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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나라 동량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시다. 을미년 민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분노를 참을 길없어 아우 문수(성균관 박사) 홍재구 유기일 유응두 등과 철원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고종의 특사로 석방되었으나 나라의 운명이 시시각각으로 위태로와지매 원주 의병진의 이인영 등과 기병하는 한편 고종황제의 밀서를 받들고 중국혁명당에 군사원조 교섭 특사로 밀파되어 활약하고 귀국하여서는 전국유약소의 경문수 유인석 전덕원 등과 궁문 밖에서 을사5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한편 일본의 간계를 폭로하는 격문을 각국공관에 비밀히 보내다가 발각되어 재차 구금의 몸이 되시다. 이어 7조약이 체결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성균관 교수직을 사퇴하시고는 향리로 돌아와 왕산 허위 김진묵 등과 손잡고 적성 삭령 안협 토산 등지에서 일군과 싸우는 한편 관동지방에 산재해 있던 각 의병진을 통합하여 연합의병대를 조직하는 한편 세전되던 가산을 군자금으로 쾌척하였다. 기미년 고종의 국상을 당하여는 장자 우현과 상경하여 유림역사대를 조직하고 청량리에서 만세시위 중 우현이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이듬해 3.1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서는 신조선 주간인 이달을 비롯하여 김영만 백의수(초월) 등과 의거 모의 중 일경에게 탐지되어 경성검사국에 검거 송치되었다. 1920년 8월에는 미국의회 극동관찰단이 내방하자 일본의 비인도적 행위를 규탄하는 「신명서」를 수교하고 국권회복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1922년 8월에는 일본대의사 황천오랑일행의 민정관찰단을 맞아 윤길병 전문 신긍선 동지들과 더불어 공동여관(현 조선호텔)에서 만나 대한의 자주독립 필요성과 일본의 신의배반을 통박하였다. 반평생을 오직 구국일념으로 동분서주하시던 공께서 드디어 1928년(무진) 10월 9일 한서린 임종을 고하시니 향년 68이시다. 후학들이 포천 운담사에 우암과 중암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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