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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기는 전라남도 광주(光州) 출신이다. 1907년 1월 24일, 을미의병에 참가하여 전라도 일대에서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성재 기삼연(奇參衍) 등과 함께 의거의 기치를 올렸던 녹천 고광순(鹿泉 高光洵) 의진의 참모로써 입대하였다. 이 의진에는 고광훈(高光薰)·고광수(高光秀)·고광채(高光彩)·박기덕(朴基德) 등이 참여하여 창평 저산 분암(昌平 猪山 墳庵)에서 창의의 기치를 올렸다. 4월 25일(음 3월 31일) 능주(綾州) 사림의 협력을 받아 화순(和順)을 점령하고, 일본인 거주민의 가옥을 모두 불태워 관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튿날 다시 동복(同福)으로 진군하였는데, 광주부에서 파견된 관군과의 도마치(圖馬峙) 전투에서 의병은 패배하고 군사들이 일시 모두 흩어졌다. 고광순 의진은 8월에 다시 몽암 신덕균(蒙庵 申德均) 의진과 합세하여 창평 제심리(齊心里)를 중심으로 집합 연락하며 대규모의 거사를 계획하고 인봉 고제량(高濟亮)의 창안으로 불원복(不遠復)의 글자를 새긴 군기를 사용하여 군사들을 격려하며 훈련시켰다. 9월 11일 천지신명께 제사를 드려 맹서한 다음 9월 12일 행군하여 동복 땅을 지나 곡성군 구룡산(谷城郡 九龍山) 아래에 이르러 장차 지리산으로 들어가 장기 항전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이때 신덕균의 제안으로 일본인이 많기로 유명한 동복읍을 우선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14일 새벽 동복을 공격, 적을 궤산(潰散)시킨 후 다시 남원(南原)·곡성(谷城) 등지를 지나며 격문을 각 곳으로 보내어 인심과 사기를 고무하였다. 9월 17일 지리산 화개동(花開洞)으로 들어가 군사를 훈련시키니 동복·순천·곡성·광양·구례 등지로부터 군사들의 참여가 점차 늘어 1천 명에 이르게 되었다. 유진 훈련 중에 윤덕기는 신덕균과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광주 진위대의 해산병들을 수습하여 많은 군사들을 얻어 돌아왔다. 그후 10월 17일 구례 연곡사(燕谷寺)를 본영으로 정하고 부서를 개편하였다. 고광수·고광채·고광덕·고광석·고광명 등 녹천의 근친들은 유격과 호위를 담당하였고 신덕균은 참모, 윤영기는 호군에 임명되었다. 이때 광주의 일본 수비대가 이들을 공격해 왔다. 이 전투에서 의진은 분전하였으나 의병장 녹천이 전사하고, 고광훈 등이 체포되자 의진은 흩어졌다. 그러나 마침 소모차 나가 있던 신덕균과 윤영기는 난을 면하고 운봉(雲峰)·함양(咸陽)·순창(淳昌)·정읍(井邑) 등지로 전전하였다. 1919년에는 상해임시정부의 선언문을 군중에게 살포하였으며, 임정의 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0년 10월 일경에 체포되어 광주 형무소에서 일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