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page

2018년10월31일 수요일 8 (제142호) 시·군·구 지부 △어은재(魚隱齋) 의령군 화정면 덕교리의 어은재는 밀성박씨 좌복야공 후 국당공(휘 흥생)의 7세손 휘 상성(尙成) 公이 1597년 충북 영동에서 상정면 어은동(현 화정면 덕곡리)으로 이 거하여 터전을 잡은 곳에 입향조 이하 선조님의 위패를 모시로 재사를 받드는 곳으로 목조건물이 퇴락하여 지난 2005년 한옥형 콘크리트 건물로 중수하였다. △우양재(羽陽齋)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의 우양재는 졸당공 후 휘 세 걸 (世傑)공의재사이다. △전천재(前川齋) 의령군 유곡면 송산리의 전천재는 밀성박씨 가선대부 휘명우(明佑)공의재사이다. △내현재(乃見齋) 내현재는 아당공 후예의 재사로 의령군 유곡면 송산리 에있다. △원모재(源慕齋) 의령군 가례면 운암리의 원모재는 규정공의 13세손 휘 안(安)·번( 붕)의 위패를 모시고 향화를 받드는 곳으로 2 003년 완공하였다. △영모재(永慕齋) 의 령 군 가 례 면 상 촌 마 을 소 재 영 모 재 는 졸 당 공 후 운 암공(휘 자요) 후예의 재사이고, 마을 뒤 저수지 옆에 묘 원이조성되어있다. △벽양재(碧陽齋) 의령군 화정면 상일리의 벽양재는 아당공 후예의 재사 이다. △ 박 태 진 추 모 비 ◇충의(忠義) △박중로(朴重輅) 자(字)는 진경(震敬)호(號)는 운죽(雲竹)으로 밀성박 씨 졸당공의 후예이고 1694년 태어났다. 1728년 영조 무 신난에 종제 동로(東輅),아우 취로(就輅)와 향인 이영무 와 더불어 의병을 창송할 무렵에 병사 이시번이 듣고 그 들을 장하게 여겨 공으로 하여금 두 동생과 같이 성을 굳 게 지키게 하고 영무는 자기 진영을 지키게 하니 대개 公 의 지혜와 용맹이 있었으므로 능히 인심을 진압할 수 있 었다. 얼마 아니하여 공은 군사를 거느리고 거창읍으로 진군하여 복병을 하고 적을 유도하여 영무와 함께 적병의 괴수를 포로로 잡아 난을 평정한 뒤에 마을로 돌아와서 그의 공로를 말하지 않고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뒤 에야 자헌대부 공조판서에 추증되었고 화산사에 배향되 었다. △박동로(朴東輅) 자는 진수(震壽)이고 호는 설송(雪松)으로 운죽공 휘 중로(重輅)의 종제이다. 1695년에 태어나 용부(勇夫)로 일컬었다. 영조 무신난에 적신 정희량이 군사를 들어서 이인좌에 응접하려고 거창 소사에 웅거하고 있으므로 공 (公)은 분연히 일어나 종형제 중로, 취로, 이영무와 상의 하고 마을 장정 100여명을 통솔하여 두 진영을 종형제와 같이 현감대신 성을 지킬 때 적당(敵黨)이 성을 넘어 투 서하는 자를 즉시 목 베어서 매어달았고 또 자기집 여종 이 그 아들의 병역을 면하려 함으로 죽여서 회시하였다. 그러므로 군민은 군법을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공은 군 사를 지휘하여 적병을 전멸하고 수급을 대장 이석복 진중 에 넘기고 자기의 공로는 말하지 않았다. 그 뒤에 가선대 부 동중추에 이르렀고,순조 신묘년에 자헌대부 공조판서 에추증되었다. △박취로(朴就輅) 자는 진칠(震七)이고 호는 은월(隱月)으로 운죽공 휘 중로(重輅)의 아우이다. 숙종 임오년(1702년)에 출생하 여 지략(智略)으로써 알려졌다.무신란에 형들과 함께 참 여하여벼슬이자헌대부공조판서에추증되었다. △박준남(朴俊南) 호(號)는 송암(松巖)으로 밀성인 충헌공의 후예로 아 버지 휘 혼동(渾東)과 어머니 달성서씨 사이에서 1564년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의를 맹세하고 적과 대항하다 가 남강변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벼슬은 병조정랑이며, 선조갑오년(1594년)7월 13일 순절하였다. △박무열(朴武悅) 자(字)는 은경(殷卿)이고 호는 만취헌(晩翠軒)으로 밀 성인이다. 선조 기사년(1569년)에 출생하였고, 무자년(1 58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훈련원첨정이 되고 임 진란에 동쪽 수문장이 되어서 왜병 63급을 죽이니 상감께 서 손을 어루만지며 칭찬하시고 특히 선무랑 충좌위중부 장에 제수하여 어전을 호위하여 떠나지 않게 하였다. 을 사년에 원종일등공신에 녹권 되었고,어버이 병환에 손가 락의 피를 드리워 7일을 더 연명하였고, 상(喪)을 당하여 서는 예의제도에 따른 것으로 모두가 효자라고 일컬었다. 공의 자손이 창원에서 의령으로 이주함으로 충효비가 세 워졌기때문에의춘지에실리게되었다. ◇효자(孝子) △박운삼(朴雲參) 자(字)는 치흥(致興), 반남인이다. 1704년생으로 아버 지 병 환 여 러 달 에 잉 어 가 먹 고 싶 다 하 니 이 때 물 이 불 어 서 수침이 되어 마을사람들이 그물을 가지고 천엽을 하고 공은 홀로 어구도 없이 섰는데 문득 여덟 마리의 고기가 공 의앞에뛰어나왔다.공은급히잡아서올렸는데부친의고 질병이 나았다.상을 당하여는 애훼함이 예를 넘쳤다.사람 들이왕상에비교하였고,관에올린정문이있었다. △박태무(朴太茂) 자(字)는 여경(汝景)으로 천성이 지효하여 어머니 병 중에 올릴 것이 없어 근심하는데 홀연히 꿩이 주방으로 날아드니 어머님을 공양하였고, 기절을 하여 단지주혈로 회생시켰고, 별세하여서는 장사하는 날에는 냇물의 장애 도 단수가 되고 상제 날에는 꿩이 들어 제물이 된 것이다. 3년의시묘에효자가났다하여향도의장계가있다. △박춘상(朴春祥) 자(字)는 내열(乃烈)이요 반남인 운삼(雲參)의 아들이 다.1771년생으로 성품이 효의하여 아버지가 병환에 잉어 고기를 원함으로 물가에 가서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고 있 을 때 두 마 리 의 잉 어 가 뛰 어 나 왔 다 . 그 것 을 공 양 하 여 효 험을 얻었다. 경신년(1800년)에 당상하여서는 주육을 전 폐하고 3년 상을 마쳤다.국상에도 또한 그렇게 하여 관영 에 올 린 장 문 이 있 다 . △박성권(朴成權) 자(字)는 사권(士權)으로 밀성인이다. 일찍이 아버지 를 여의고 편모 봉양에 어김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과일 한 개라도 어머니께 드렸고, 자라나서는 품팔이를 하여 봉양하였는데 이때 남도지방에는 의병이 일어나 가는 곳 마다 점령을 하고 관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공이 사는 곳 이 읍 부근으로 양군이 서로 짓밟아 마을 사람들은 견딜 수 없이 도망을 하였다. 공의 어머니는 늙고 병들어 행보 를 못하자 공이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마음을 편안하 게 위로해 주는데 군사들이 불을 질러 마을이 전부 잿더 미로 변할 때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업고 피난길을 가야 했는데, 군사들은 물러가고 불도 꺼져 공의 모자는 무사 했다. 그 뒤 모친이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 공은 매우 슬퍼 했다.마을에서는 효자 표창을 하였고,김우림(金佑林)이 사적비문을지었다. ◇열녀(烈女)·효부(孝婦) △표진장의처밀성박씨 지극한 성품이 하늘에 뿌리 하여 시어른을 받드는데 정 성을 다하였고 시모가 별세하니 애훼진예하고 죽을 마시 며 예제를 마쳤고 늙은 시부를 받들어 정성을 다할 때 흉 년에도 배고픔이 없었고 가난하지만 괴로움을 몰랐다.시 부의 병이 점차 위독하자 상분 단지하였고 하늘과 땅에 빌며 성실히 효도하여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상을 당하 여는 앞의 상례와 같이 하니 향도와 어사의 상문이 있었 다. △김동익의처밀성박씨 효부 박씨의 관향은 밀성이요 아버지는 상진(相鎭)이 며 어머니는 허씨다. 고종 병인(1866년)생으로 나이 18세 에 김동익에게 시집갔다.동익의 관향은 경주요 부(父)는 수제(秀濟)며 母는 김해김씨이니 해로하여 계셨다. 박씨 는 며느리의 도리를 부지런히 하였는데 남편이 병들어 눕 게 되자 집안이 가난하여 혼자서 약을 구하여야 하고, 시 부모를 모시며 산에서 나무하고 양식을 구해야 했다. 비 가 오나 눈이 오나 혼자서 일을 감당하여야 하니 밤잠도 잘 수 없 고 더 욱 이 시 부 는 술 을 참 지 못 했 음 으 로 꼭 구 하 여드렸다. 동네 사람들이 입을 모아 그의 효성을 칭찬했다. 일가 들이비를세워찬양했다. △박병화의처의령옥씨 옥씨는 초준(楚俊)의 따님이다. 성품이 얌전하였는데 영화에게 시집갔었는데 불행이도 3살 된 어린 것을 두고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옥씨 나이 겨우 25세인데, 죽음을 각오하고 칼날을 가슴에 겨눌 때 시어머니가 황급히 울며 말렸다. 옥씨는 시어머니 무릎에 엎드려 통곡하였다. 다 시 마음을 고쳐먹고 시모님을 성심껏 모시고 온갖 노동 품팔이로 어린 것을 양육하는데 정성을 기울였다.20여년 을 시어머니 잘 모시고 자식을 성취시켜 문호를 보전케 하였다.효열비가가례면수성리에세워졌다. △전시유의처고령박씨 담양인 전시유는 판추 자성(判樞 自成)의 11세손이며 박씨는 학암 정번의 후손 통덕랑 영갑(英甲)의 따님이다. 17세에 시집 온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남편이 종기를 앓 았는데 입으로 고름을 빨아서 낫게 하였다. 또 병환으로 심음 하게 되자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으나 끝내 천명을 어길 수 없기로 따라 죽으려고 하였으나, 마음을 돌려 홀 로있는시모를위하여정성을다하였다. △박종태의처강양이씨 효부 이씨는 규용(奎鏞)의 따님으로 18세에 종태의 아 내가 되었다. 시집 온지 4년 만에 남편이 병이 나서 지성 으로 간호하였으나, 세상을 떠났다. 남편 따라 죽으려고 하니 집안사람들의 경계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부인은 임신한 몸으로 다행이 남아를 낳으면 가문을 이어가겠기 에 마음을 고쳐먹고 시어른에게 정성을 다하여 공양하는 데 힘썼다. 얼마 후에 유복자를 낳았는데 훌륭하게 양육 하여문호를보존하였고,평생토록절개를지켰다. △박종규의처달성서씨 효부 서씨는 정순한 덕이 있다고 일컬어졌는데 남편이 병으로 죽게 되어, 집은 가난하고 자식은 어리고 노모가 계시는데 유감이라고 말하니 부인이 소접이 있으니 마음 을 안정하라고 말하자 남편이 곧 별세하였다. 부인은 정 성껏 장례를 치르고 시모를 봉양하면서 어린 것을 잘 기 르는데 시모는 상심을 하여 중한 병이 되자 부인은 높은 산을 헤매어 좋은 약초를 캐러 다니다가 굴러 낭떨어지에 떨어졌는데 칡덩굴에 걸려서 목숨을 건졌다.부인은 즉시 그 풀을 캐어서 다시 드렸더니 시모의 병은 완쾌되었다. 고부간에의좋게평생을화목하게넘겼다. △박홍묵의처진양강씨 강씨는 선비 홍묵의 처로 시어른을 효도로 섬기고, 남 편을 공경으로 받들었다. 집이 가난하여 길쌈과 정구로 노력하여 가정이 안정되고 내외가 해로하던 중 기사년 섣 달에 부구가 함께 병을 얻어 다음해에 남편이 죽었고, 부 인은 병중에 정신이 혼미하여 모르고 있었는데, 그 뒤에 알고 크게 슬퍼하여 임종시에 한 말씀도 듣지 못하고 어 찌 이렇게 되었는고? 나 혼자 살수 없다하고 여러 동서들 에게 우리 집을 잘 보호하라 하고 간수했던 돈을 내어서 주며 우리 아이 장가 갈 때 쓰라고 부탁을 하고 밤중에 새 옷 입고 기절해 죽은 때는 신미년 정월달이다. 중규, 중모 (重圭,重模)가마을앞에비를세워열행을표하였다. /박수창명예기자(경남의령군지부) 뱚▶7면에서이어짐 뱚▶인물(人物) 밀양시지부 여성회(회장 박소영)는 10월 3일 오후 1시부터 10시까지 야간 행사를 병행한 1일 관광을 실시하여 회 원간 공감하고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 다. 이날 행사는 역대 회장과 회원 30여 명이 참석하여 우리의 강령과 삼강의 실천을 다짐하는 단합행사로 부산시 일 원을 둘러보았다. 낮에는 태종대의 순 환괘도열차와 송도의 해상케이블카 이 용으로 바다와 하늘을 가로지르는 감동 의 시간으로 서로의 친목을 다지고 자 갈치 어시장에서 활어회와 식사로 간친 (懇親)의자리를마련했다. 야간행사로 수영만에서 요트를 대절 하여 광안대교와 주변의 야경을 감상하 며 회원들의 시낭송 등 여성회의 융성 을 염원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함께 한 시지부 영호 사무국장은 여성회의 역할이 지부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다 고 호평하면서 여성회 운영에 적극 노 력하겠고 말했다. 밀양시지부 여성회는 1998년 창립하여 제11대 회장으로 소영 회장이 지난 4월 3일 취임하여 회원 자 녀 3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20여명 이 하계연수회에 참여하 는 등 열정적으 로활동하고있다. 밀양시지부여성회1일관광호평 강령과삼강의실천을다짐하는단합행사 밀양시지부 여성회원 30여명이 1일 관광을 실시하여 여성회의 융성을 다짐했다.(사진 둘째 줄 오 른쪽에서 4번째가 소영 회장) 경북 성주군지부(회장 정용)는 지난 달 23일 박정용 회장을 비롯한 임원진 이 제향 일정 변경사실을 모르고 추향 대제참례를위해오릉을찾았다. 이 날 오 릉 을 찾 은 임 원 진 은 “ 시 조 대 왕의 제향을 임의대로 변경해서도 안 될 일이지만 일정이 바뀌었으면 신문에 공고라도 하고 성손들의 이해를 구해야 하는데”라며 본보에 항의 하였으나 본 보에서도 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했다는 답변에어이없다는반응이다. 성주군지부는 매년 춘추향사에 한 번 도 빠지지 않고 참례하는 보기 드문 지 부로서 성손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하 다. 그러나 이번 향사일정 변경으로 참 례를 못해 아쉽다면서도 원로 참봉님들 과 함께 성묘를 할 수 있어 다행스럽다 며위안을삼았다. 성주군지부경주시조왕릉참배 추향대제참례위해찾았다가발길돌려 경북 성주군지부 박정용 회장(왼쪽에서두번째)을비롯한 임원진이 지난 달 23일추분일을맞아 제향에참례하기위해찾아기념촬영을하고있다. 가을의 풍요로움과 일가간의 정이 어 우 러 지 는 아 름 다 운 시 간 속 여 행 이 지 난 20일 토요일 부산 금정구지부(회장 수종)종원 47명에 의해 수놓아진 듯 하 다. 부산금정구지부 가을 단합대회는 만 산에 홍엽이 된 단풍을 뒤로하고 먼저 숭조의 길을 택했다. 오전 8시 부산을 출발하여 진주 금산면 속사리의 물언재 (勿言齋)를 찾아 밀성박씨 아당공 선조 이하 제단을 참배하고 905위의 위패가 봉안된 물언재 정당에서 아당공 선조의 행장과 장묘문화 개선 및 후손들이 모 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위패 봉안 당을 설치하였다는 설명을 듣고 선진 (先進)종사를 체험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며이구동성으로말한다. 이어 애종과 화합의 시간으로 경상남 도 수목원을 찾아 우리나라 한반도 권 역별 및 지리산·덕유산권의 희귀·특산 식물자원을 체험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호암 이병철 회장 생가를 찾아서는 이 회장의 삶과 생가의 지리적 여건을 통 한 부(富)의 생성과정을 일붕사를 찾아 서는 세계기네스북에 오르는 동굴법당 을 둘러보며 소원을 빌기도 하는 등 하 루 일정모두가 화기애애한 시간 속에 금정구지부 발전에 기여할 것을 다짐하 는등알찬가을단합대회를가졌다. 금정구지부는 1984년 동래구에서 분 구되어 지금에 이르는 동안 매년 숭조 사업으로 선진지 견학 및 유적탐방을 애종사업으로 단합대회를 갖는 등 대도 시에서도 종중사업을 원활히하면서 성 손간 친목을 다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날 행사에서 수종 회장(구서2동 새 마을금고 이사장)은 이동하는 버스에 서 인사말을 통해 바쁜 생활 속에서도 많이 참석하여 주시어 감사드린다고 말 하고 적극적인 동참으로 금정구 발전에 함께하자고 하였으며, 진국 직전회장 (현 부산본부 회장)은 ‘非禮勿視(비례 물시) 非禮勿聽(비례물청) 非禮勿言 (비례물언) 非禮勿動(비례물동) 예가 아 니 면 , 보 지 말 고 듣 지 말 고 말 하 지 말 고 행하지 말라.’는 논어의 한 구절(句 節)을인용하며정도의길을강조했다. /박영철명예기자(부산금정구지부) 부산금정구지부가을단합대회가져 부산금정구지부 종친회가을단합대회가지난 20일47명의종원이 참석한 가운데이날 행사는숭조와애종을함께 실천하는소 중한 시간이 되었다. (사진은경남수목원에서) 유명관광지대신선조유적과선진지견학을통해숭조와애종을함께하는유익한시 간되어 밀성박씨물언재위패봉안당에서참배후해원회장과 용권고문으로부터설명을듣고있다.물언 재는현재905위의위패를봉안하면서장묘문화를개선하고종원들이 한자리에모일수있는계기 가 되고 있다.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