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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보 - 양성우 지음
들리는가, 친구여 갑오년 흰 눈 쌓인 배들평야에
성난 아비들의 두런거리는 소리
만석보 허무는 소리가 들리는가 그대 지금도
그 새벽 동진강머리 짙은 안개 속에
푸른 죽창 불끈 쥐고 횃불 흔들며
아비들은 몰려갔다 굽은 논둑길로
그때 그 아비들은 말하지 못했다
어둠을 어둠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아픔을 아픔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본 것을 보았다고 말하지 못하고
들은 것도 들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날 저문 남의 땅 황토언덕 눈물뿐인 오목가슴
주먹으로 치며 달을 보고 울었다
그때 그 아비들 가을걷이 끝난 허허벌판에
반벙어리 다 죽은 허수아비로 굶주려도 굶주림을
말하지 못하고 억울해도 억울하다고 말하지
못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주눅들고
천이면 천 만이면 만 주눅들어서
죽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만 쉬고
빌어먹을 이놈의 세상 밤도망이라도 칠까?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한숨만 쉬었다
제 똥 싸서 제 거름 주고
제가 거둔 곡식은 제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오뉴월이면 송장메뚜기라도 잡아먹지
오동지섣달 길고 긴 밤 그 허기진 배 오죽했으리
모진 목숨이 원수였고 조병갑이 원수였다
이방 포졸 떴다 하면 닭 잡고 개 잡아라
쑥죽 먹는 신세라도 사또조상 송덕비 세워주고
사또에미 죽었으니 조의금 천 냥을 어서 내라
못살겠네 못살겠네 보리쌀 한톨이 없어도
억새풀 묵은 밭 천수답 다랭이 물세를 내고
죽자사자 낸 물세를 또 내고 또 내라고 하고
못 내면 끌려가서 죽도록 얻어맞고
아아, 전창혁이 곤장 맞아 죽던 날 밤엔
만석보 긴 둑에 무릎 꿇고 앉아 하늘에 빌었다
고부 장내리 사람들 차라리 마을마다 통문이나
돌릴까? 이 야윈 가슴팍에 비수를 꽂을까?
아비들은 주먹으로 허공을 가르고 아아
전창혁이 곤장 맞아 죽던 날 밤엔 피눈물만 있었다
그 산비탈 밤은 밤으로만 남아 있었고
칼은 칼로만 남아 있었다 겉늙은 전라도
굽이굽이에 굶주림은 굶주림으로만 남아 있었고
증오는 증오로만 남아 있었다 먼지 낀 마루 위에
아이들은 앓고 신음소리 가득히
그릇에 넘쳤나니 오라 장돌뱅이 어둠 타고 오라
나무껍질 풀뿌리로 살아남아서 장성 갈재 훌쩍 넘어
서둘러 오라 맞아죽은 아비 무덤 두 손으로 치며
전봉준은 소리 죽여 가슴으로 울고
분노는 분노로만 남아 있었고
솔바람 소리는 솔바람 소리로만 남아 있었다
구태여 손짓하며 말하지 않아도 누구누구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은 알았다
그 손님들을 찬바람 서릿길 깊은 밤이면 썩은새
감나무집 작은 봉창에 상투머리 그림자들
몇몇이던가를 구태여 손짓하며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은 알았다 아이들까지도
김도삼이 정익서 그리고 앉은뱅이 두루마기
펄럭이며 왔다가 가고 그 밤이면 개들이
짖지 않았다 개들도 죽은 듯이 짖지 않았다
장날이 되어야 얼굴이나 볼까?
평생을 서러움에 찌든 사람들 찰밥 한 줌
못 짓는 무지렁이 대보름 진눈깨비 내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