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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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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선생은 전봉준 정익서 등과 삼 장두(狀頭)로 1893년 11월 배들평야 농민들과 함께 갑오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보세 감면을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오히려 난민의 주동자로 다스려 형벌에 체하고 3 장두의 집을 모두 불태웠다. 갑오농민혁명 당시에는 정치와 기강이 해이되고 서구세력의 거센 물결에 밀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는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기치아래 혁명결의의 내용을 각리 집강에게 보내고자 사발통문을 직접 작성하여 혈서로써 맹세하니 서명자 20명 중의 한사람이다. 각지에 격문을 부치고 의병을 소집한바 선생의 인품과 뜻을 추앙하여 수천명이 모여들어 이평면 두지리에 소재한 말목장터 감나무 밑에서 고부 관아를 습격키로 모의 죽창을 만들어 무장을 시키고 대오를 2진으로 편성하여 1진은 도사인 전봉준장군이 인솔 정익서 등과 영원면 후지리를 경유하고 2진은 부도사인 김도삼 선생이 인솔 산매리와 도계리를 거쳐 천치재를 넘어 고부에서 합세하여 고부 관아를 기습하니 조병갑 군수는 줄랑행랑을 쳤었다. 고부관아를 점령한후 억울하게 옥에 갇혀있든 죄수를 풀어주고 창고에 가득한 식량을 나누어 주니 그 은헤에 감격 하였고 의병들은 무기고를 부수고 총기로 재 무장을 시키니 사기가 충천 하였다. 이후 동학 농민군으로 다시 편성하여 선두에서 지휘 삼례까지 승승장구 진격하였으나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붙잡혀 1895년 1월 26일 전라 감영에서 40세의 나이로 천추의 한을 품고 옥사 하였으니 갑오농민 혁명의 주도적 역활을 한 선구적인 인물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밀양박씨와 두 아들 영락 정락을 두었고 증손 태수가 대를 이어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