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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6월30일 토요일 4 (제138호) 기 획 1995년 설립된 밀원문화연구회(회장 근영)는 숭조 애종 육영을 기본으로 하고 밀성(밀양)박 씨 선현들의 유적과 문물을 관리보존하며 고문 헌을 발굴 연구하고 선조님들의 숭고한 정신문 화를 후예들 가슴속에 접할 수 있도록 현대문으 로번역보급함을목적으로하고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깊이 있는 연구와 토론, 그리 고 회원간 친목을 도모하고 있는 밀원문화연구 회는 매 회의마다 강사를 초빙하여 보학강좌를 들어왔다. 본보 상섭 국장의 ‘밀성대군 후 12중조 이야 기’, ‘원덕사와 배향선조 알아보기’, 박상만 교수 의 ‘박상만의 풍수이야기’ 박종순(朴鍾淳) 변호 사의 뷼밀양박씨 중조(中祖) 삼사좌윤공(三司左 尹公) 을재(乙材) 선생에 대한 소고(小考)뷽 등 지금까지 많은 강사를 초빙하여 강좌를 열었으 며, 특히 지난해에는 박흥학 회원이 연구 저술한 겸재(謙齋)정선(鄭敾)과 백거(伯擧)박자진(朴 自振)에 관한 소고(小考)』의 책자를 발간 배포 하고, 2017년 5월에는 원덕사를 방문 참배하고 배향된 22현조 선현들의 업적을 되돌아보는 유 적탐방 행사를 계획하여 년 2~3회에 걸쳐 사문진 사공파 종중의 삼송재,행산공파 정읍 현암 문중, 은산부원군파 추원재, 행산공파 행산재, 영동정 공파무숙공부조묘등을돌아보았다. 지난 14일에는 은산부원군파의 용강서원과 밀 직부사공파의 훈령서원, 밀직부원군파의 묘봉 재, 오졸재 박한주 여포비를 하루 일정으로 찾아 함께해보았다. 박근영 회장은 이날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아 하 나씩 하나씩 알아가면서 선조님을 제대로 모시 고 싶어 유적탐방에 나섰다고 말하고 더 많은 회 원이동참하여함께해보길바란다고말했다. 밀원문화연구회는 밀성대군 후손이면 누구나 가입을 환영한다.(문의 010-8935-6587박동규) 용강서원(龍岡書院)은 청도에 정착해온 밀성 박씨(密陽朴氏) 소고공(휘 건) 문중의 그 현조 (玄祖)인 충숙공 박익(忠肅公朴翊)과 임란14의 사(壬亂14義士)를 재향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 해건립한곳이다. 소고공(嘯皐公) 박건(朴乾) 선생은 충숙공 박 익 선생의 손(孫)으로 조선 초기 밀양으로부터 청도로입향시거(始居)한청도입향조이다. 창건연혁을 보면 선조 23년(庚寅, 1590)에 후 손들이 묘소아래 묘재(墓齋)를 창건하여 용강재 (龍岡齋)라한것이서원의시원(始原)이다. 순조 19년(己卯,1819)에 충렬사(忠烈祠)를 용 강재 경내에 창건하고 청도 임란14의사 위판을 봉안하여 춘추로 사림(士林) 향사하고 익년에 숭의사로 개편하고, 현종 원년 을미년(1835) 봄 에 청도에 거주하는 성손가(姓孫家)에서 송은 선생의 영정이 발견됨으로서 숭의사(崇義祠)에 영정과 위판을 주벽으로 봉안하고 14의사를 배 향하였다. 고종 5년(戊辰, 1868) 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에 의해 사당이 훼철되어 향화는 단절되고 유지만 보존하다 고종 13년(1876) 경내에 14의사 묘정 비와 비각을 건립하였다. 고종 16년(己卯, 1879) 에 모의정(慕義亭)을 경내에 건립하였고, 그 후 1913년에 향중(鄕中)의 공의(公議)로서 송은 선 생 묘 우 (廟 宇 )만 을 복 원 하 여 영 정 과 위 판 을 봉 안하고 송은선생 영당(影堂)이라 편액하여 춘추 로 사림 봉사하게 되니 이때부터 용강재를 용강 서당으로 개편하였다. 1960년 강당을, 익년에는 숭절문(崇節門)을 중건하였으며, 1986년에 14의 사 사우인 숭의사를 복원코자 별구(別區)에 동 년 11월에 기공하여 익년 12월에 준공하고 충렬 사(忠烈祠)로환원하였다. 1992년 4월 22일에 사림의 공의로 송은선생 영 당을 여충사(麗忠祠)로 용강서당을 용강서원으 로 개편하였고, 1998년 향중 공의로 여충사에 송 은 선생의 장자(長子)인 우당(휘 융) 선생의 위 판을 함께 봉안하고 춘추로 사림봉사하기 시작 하 였 으 며 , 이 해 8 월 3 일 충 렬 사 및 1 4 의 사 묘 정 비가경상북도기념물제129호로지정되었다. 현재 경내에는 송은 선생과 맏아들 우당 선생 의 위판을 모신 여충사,14의사의 위판을 모신 충 렬사, 강당, 용강재, 동재, 서재, 14의사 묘정비, 숭절문등이있다. △송은박익선생(1332~1398) 선생은 1332년 7월 27일 밀양 부북면 삽포리에 서 태어났다. 자(字)는 태시(太始) 휘는 익(翊) 으로 초휘는 천익(天翊)이며, 시호는 충숙(忠 肅)으로호는송은(松隱)이다. 고려 공민왕조에 등제하여 한림문학, 사재소 감, 예부시랑 등을 역임하면서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야은 길재,도은 이숭인 선생등과 도의지 교 하였고, 왜구와 호적(胡賊)을 정벌하는데 진 충보국(盡忠輔國)하였으나 고려의 운수가 다하 여 이태조의 역성혁명의 기미가 보이자 벼슬을 버리고 포은에게 ‘문견선천사(聞見先天事, 지난 날의 일들을 듣고 보니)/ 영명욕세간(榮鳴辱世 間, 영화롭던 이름이 세간의 욕이 되고 있구려)/ 막언심내사(莫言心內思, 마음속 깊은 생각 말할 것 없이)/ 불사조환산(不似早還山, 일찍이 산으 로 돌아감만 같지 못하리)’라는 시를 남기고 고 향으로 돌아와 두문불출 자정(自靖)하면서 시와 서(書)로교우(交友)들과세월을보냈다. 그 후 1395년 이태조께서 예폐(禮幣)를 갖추고 예관(禮官)을 보내 공조,형조,예조,이조판서와 마지막에는 좌의정의 벼슬로 다섯 차례 불렀으 나 선 생 은 맹 오 (盲 졀)라 칭탁(稱託)하면서 죽음 을 각오 한 채 왕명을 거절한 신무이군(臣無二 君) 정충탁절(貞忠卓節)의 정신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바이다. 선생의 묘는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에 있으며, 2000년 9월 22일 태풍으로 인한 보수작업 중 도 굴 흔적과 화문석이 발견됨에 따라 신고를 접한 문화재청에서 발굴 조사한 결과 석실내부에 벽 화가 그려져 있고, 고려시대의 풍속벽화이며 양 식과 채색, 인물과 매죽(梅竹)이 함께 그려진 점 등,조선 초기 무덤에서 고려시대 양식은 처음 발 굴되고, 특이한 양상과 화려함은 사료적 가치가 많아국가사적제459호로 지정되었다. △우당(憂堂)박융(朴融,?~1428) 선 생 의 字 는 유 명 (惟 明 ) 휘 는 융 (融 ) , 호 는 우 당(憂堂)이다.송은선생의장자(長子)로서밀양 삽포리에서 태어났다. 포은선생의 제자로서 벼 슬을 하지 않다가 송은 선생께서 ‘오귀왕혼(吾歸 王魂, 나는 죽어 왕씨의 혼령을 따라가나)/ 여재 이세(汝在李世, 너희들은 이씨의 세상에 있게 되 었다.)/기위인신(旣爲人臣,이미다른사람의신 하가 되었으니)/ 충즉갈력(忠則竭力, 힘을 다해 충성을 다하라)/ 선천후천(先天後天, 선천과 후 천이라)/ 부자이시(父子異時, 부자 사이지만 시 대가 달라졌다)’라는 유명(遺命)을 받은 10년 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수찬, 전한, 형조좌랑, 금 산군수, 이조정랑, 성균관사예 등을 지내다가 14 28년 함안군수 재직 시 돌아가셨으며, 진주 촉석 루에 선생의 제영운(題詠韻) 시(詩)가 현재도 남아있다. 1424년 경상도 도사로 재임 시에는 청도향교 및 각 고을의 향교를 중수하고 제례제법을 고증 하여 정비 제정하고, 제기(祭器)를 일신 보완하 는데힘썼다. ▶청도임란14의사(義士)-12면참조- 두촌선생(杜村先生 諱 揚茂)의 曾孫이신 화은 선생(華隱先生 諱 繼恩)께서 1471년 한재(大峴) 에서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新村里-新安)로 옮 겨 자양산(紫陽山) 서당골의 풍치(風致)를 뒤로 하고 앞은 원하게 넓은 들이 비토(肥土)라 가히 의식(衣食)과 산수(山水)의 락(樂)을 가질만한 자리로 마땅하다 보시고 세업(世業)할 터로 정 하고 신안 훈령산(薰嶺山) 아래에 글방(書堂)을 짓고 글을 베풀어 교남사림(嶠南士林)이 알고 즐겨 교통(交通)하므로 훈령서당이 종사(宗事) 를 보는 재궁(齋宮)을 겸하여 문(文)과 도의(道 義)를 강론 육성하는 학당(學堂)이 되어 유문 (儒 門 )이 더 욱 창 달 (暢 達 )되 고 위 선 종 사 (爲 先 宗 事)의 중심으로 오백년 전으로부터 종인(宗人) 은 강당으로 일컬어 오늘에 이르니 역사가 깊다 하겠다. 불행이 1592년(선조25)의 임진병화(壬辰兵 禍)로 집이 불타고, 1623년(仁祖1)에 다시 중창 (重創)하여 훈령서당(薰嶺書堂)을 훈령재(薰嶺 齋)로 이름을 바꾸고 1844년(憲宗10)에 지산서 원(芝山書院) 창건(創建)을 병행하여 재사(齋 舍)를 중수(重修)하고 이듬해인 1845년에는 숭 절사(崇節祠)를 지어 입향조 두촌 선생과 화은, 호재,농암 선생의 네 분의 선조를 배향하였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 훼철(毁撤)로 없어졌다. 그후, 1986년에 숭절사를 다시 복설(復設)하 여 음력으로 삼월과 구월 상정일(上丁日)에 제 향(祭享)을올린다. 1908년에 중수한 본당(本堂)건물의 일부가 후 락(朽落)하고 빈약(貧弱)하다는 종론(宗論)으 로 종인(宗人)의 위선(爲先)하는 헌성(獻誠)이 마음으로, 돈으로, 넘쳐 구색(具色)의 문제로 한 두 개 를 고 을 안 타 산 (他 山 )의 재 목 ( 材 木 )을 썼 을 뿐 외 국 ( 外 國 ) 재 목 (材 木 ) 은 한 자 한 치 를 아 니 쓰고 순전히 문중 골안 수백정(數百町) 종산 (宗山)의 수 백년 거목 장송(長松)으로 감당하 여 고을에서 제일가는 본당(本堂)을 지어내니 보는 사람이 모두 장대(壯大)하다 흠탄(欽歎)하 였다. 이에, 고을사람이 부러워하고 인하여 1999년 향도유림(鄕道儒林)이 훈령재를 훈령서원(薰嶺 書院)으로승호(陞號)하여지금에이른다. △두촌박양무선생(杜村朴揚茂先生) 자(字)는 약생(若生) 호(湖)는 두촌(杜村) 고 려 공민왕 때 등제(登第)하여 선무랑(宣務郞)이 되고 김천도독우(金泉道督郵)를 하였다. 포은 정몽주선생 문인으로 종유(從遊)하며 우공 현보 (禹公玄寶-字는 原功 丹陽人)와는 막역지우(莫 逆之友)였다. 품성이 청백 단아한 준재(寯才)로 촉망(囑望)되었으나 고려의 운명이 다함을 슬퍼 하던 중에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성조용흥정오문(聖朝龍興正午門) 밖 만수산 깊 은 골짜기로 퇴거(退去) 했다. 선생은 만수산 동 지 제현(諸賢)과 우공현보(禹公玄寶)를 향하여 나는 밀성(密城)의 후인(后人)이라 내가 죽으면 선사(先祀)를 누가 받들겠는가? 사직(社稷)이 없으니 나라를 위하여 무었을 하겠는가 전가(傳 家)하여 선세(先世)를 절(絶)하지 아니함이 마 땅하다. 밀주(密州)는 내 할아버지의 고향이다. 하시고 사립(도롱이와 삿갓을 아울러 이르는 말.)으로 귀향(歸鄕)하여 화양대성산(華陽大城 山)에 은거(隱居)하고 자호(自號)를 두촌(杜村) 이라 하니 돌아가시고 사람들이 두촌선생이라 하였다. △화은박계은선생(華隱朴繼恩先生) 호(號)는 화은(華隱) 입향조 두촌선생의 증손 (曾孫)으로총민(聰敏)을타고나셨다.어릴때부 터 정성으로 어버이를 섬기고 경학(經學)에 뜻 을 두어 명현대유(名賢大儒)를 찾아 경서(經書) 를익힘으로「글이바르다」고세상에알려졌다. 세조(世祖) 무자(戊子1468)년에 생원시에 들 고 한재(大峴)에서 신안(新安)으로 거쳐를 옮겨 훈령산 아래 서당을 지어 글을 베풀었다.더욱 교 남(嶠南) 사림(士林)을 더블어 통래(通來)하니 사림(士林)이 긍식(矜式)하고 문학덕행(文學德 行)으로널리추중(推重)되었다. 많은유문(遺文)이있었다하나임란의병화와 1994년 도난 등 이대화액(二代禍厄)이 조상의 귀중한말씀을거두어간것같아한탄스럽다. △호재박맹문선생(湖齋朴孟文先生) 호(號)는 호재(湖齋)이다. 증조(曾祖)는 휘 (諱) 영립(榮立)으로 현감(縣監)을 하고 조(祖) 는발생(發生)으로장사랑(將士郞),부(父)는 생 원(生員)을 하신 계은(繼恩)으로 글공부를 타고 나서 아버지 말씀을 따르고 가전(家傳)을 긍식 (矜式)하여 소중히 섬기니 향방(鄕邦)이 그 효 성(孝誠)을 칭송하였다. 직제학(直提學) 최연 (崔淵)선생이 공(公)과같이 경지(經旨)를 강론 (講論)하며 공(公)의 문망(文望)을 흠모(欽慕) 하여 뷺공(公)의 견해(見解)는 우리 속유(俗儒) 들이미칠바아니다뷻라고하였다. 성종(成宗)때 관찰사(觀察使)의 특천(特薦) 으로 순천교수(順天敎授)가 되어 사림의 모범이 되었다. △농암공박란선생(聾巖公朴鸞선생) 1494(成宗甲寅)년에 태어나서 1557년(明宗12 丁巳)에돌아가실때까지많은일을하셨다. 중종(中宗) 임금때 사마시(司馬試)에 올라 진 사가 되고 칠곡(七谷) 오수곡(五守谷) 자연속에 정사(精舍)를 지어 정거(靜居)하며 삼족당 김선 생문(三足堂 金先生- 조선중기 문신 본관은 김 해. 字는 天佑)에 나가 의례를 강론하고 퇴계 이 황, 남명 조식, 경재 곽순 등 제선생(諸先生)과 교유(交遊)하며 높은 덕행과 밝은 수리(數理)를 떨치니 제사림(諸士林)이 추중(推重)하였다. 15 41년 청도향교 향로당(鄕老堂) 기문(記文)을 짓 고 향헌(鄕憲)과 향규(鄕規)를 목판에 양각(陽 刻) 해서(楷書)로 현판(懸板)하여 향로당에 걸 어 보전하던중 집의 퇴락(頹落)으로 칠곡 수헌 재(守軒齋)에 일시 보관하고 있다가 향교를 중 수한뒤지인재(智仁齋)에다시걸었다. 묘봉재는 밀직부원군의 재사(齋舍)이다. 경북 청도군풍각면월봉리698번지에있다. 1932년에 건축되었으며, 수차례에 걸쳐 중수 하였고, 최근에는 2016년 함석기와로 번와 하였 고,경내에는헌성비가있다. 전면 4칸의 재사는 방이 3칸, 마루1칸이고, 출 입문(삼문)과 동서재가 있는데 동재는 3칸이며, 서재는양옥기와집2칸이다. △ 밀직부원군의 휘는 중미(中美) 밀성대군의 15世 支孫(시조44世孫)이며, 工部尙書(義臣)의 次子 소감공(少監公 휘 允)의 6世孫이다. 태사공 (太師公휘彦孚)의8世孫이기도하다. 공(公)은 일찍부터 포은 정몽주 선생과 익재 이재현 선생등과 교유하며 강론(講論)하였다. 고려 29대 임금 忠穆王(충목왕 서기1344~1348 년) 때 문과에 급제하여 중서령(中書令)을 역임 하였고 고려 31代 恭愍王(공민왕 서기1351년~13 74년)때 안우 정세운, 이방실 등과 함께 홍건적 을평정했다. 공민왕 14(1365년)년에 좌사의대부 판 전교사 와 보문관제학과 순성보리공신에 녹훈되고 대광 보국 숭록대부(純誠輔理功臣 大匡輔國 崇祿大 夫)에 제수되었고, 또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 에봉해졌다. 태조가 등극하여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卒하니 왕이 禮葬(례장)하고 시호를 文肅(문숙)이라증(贈)하였다. 밀직부원군은 두 아드님을 두었는데 장남은 화령군(휘 희)이고 차남은 대사헌공(휘 해)으로 후손들은 경북 청도, 대구 시지동, 경산, 달성구 지, 영천, 울산, 경남 거창, 창녕, 양산 등지에 산 재해 있으며, 임란 의병장 대암공 휘 성(惺), 성 종임금이 “청렴하고 명량하고 맑고 깨끗하여 얼 음(氷)과 옥(玉)에 비유해도 흠이 없다.”라고 극 찬 하 며 특 별 히 청 풍 당 (淸 風 堂 )라 시 호 한 휘 영 손(英孫), 무인이자 시인으로 유명한 노계 박인 로 선생, 광복군 총사령 고헌 박상진 의사 등이 밀직부원군의후손이다.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 무오사화(戊午士 禍)·갑자사화(甲子士禍)에 희생된 박한주(朴漢 柱)[?∼1504]의 여표비(閭表碑)이다. 1629년(인조 7)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대사간 (大司諫) 김응조(金應祖)[1587∼1667]가 짓고 이관징(李觀徵)이 글씨를 썼으며, 머리의 전자 는 이희년(李喜年)이 썼다. 비각은 비의 건립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이후 보수 과정에 대한 기록 은 남아 있지 않다. 1995년 1월 14일 경상북도 기 념물 104호로 지정되었다. 비석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비 몸체,귀부,이수 를 갖추고 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308㎝이며, 비 몸체의 높이는 196㎝,너비 1m이다.귀부는 30 ㎝이고 이수가 82㎝이다. 이수에는 무늬를 새겼 으며, 귀부는 거북 무늬가 뚜렷하다. 비 몸체는 가장 윗부분에 가로로 전서체로 ‘오졸재 박한주 여표비명(迂拙齋朴漢柱閭表碑銘)’이라 음각하 고,세로로비문을음각하였다. 비각은 흙과 돌을 섞어 쌓은 담 안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이익공 오량가 팔작기와집으로 남동 향하고있다. 내부는 통칸으로 바닥은 시멘트를 발랐으며, 중앙에 비석을 세웠다.얕은 시멘트 기단 위에 자 연석 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배흘림을 두 었다. △오졸재박한주선생 선생의 휘는 한주(漢柱), 자는 천지(天支), 호 는 오졸재(迂拙齋)다. 밀성대군의 14世 행산공 (杏山公)의 현손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85년 문과별시 (文科別試)에 급제하여 1497년(연산군 3) 사간 원헌납이 되어 연산군의 실덕(失德)을 직간(直 諫)하였고 또 임사홍(任士弘) 등의 간악함을 탄 핵하는 차자(箚子)를 올리는 등 직간을 서슴지 않으면서 무오(戊午)·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 루 되 어 화 를 입 었 다 . 이후 1506년(중종 1)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 고, 1517년 김정(金淨)·조광조(趙光祖) 등의 계 (啓)에 의하여 도승지 겸 예문관직제학이 추증 되었다. (본보 2018년1월12면 참조) /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밀원문화연구회와함께떠나는유적지탐방 용강서원·훈령서원·묘봉재·오졸재 박한주여포비 훈령서원을찾아숭절사에참배후밀직부사공파종원들과 함께하고있는밀원문화연구회선조유적탐방단. 뱚■용강서원(龍岡書院) 용강서원전경.경북 청도군이서면모산길45-4 용강서원내충렬사에참배하고있다. 뱚 ■배향인물 뱚■훈령서원(薰嶺書院) 훈령서원전경.경북 청도군이서면신촌리 뱚 ■배향인물 뱚■묘봉재(妙봉재)와 밀직부원군(휘중미) 묘봉재를찾아기념촬영을하고있다. 12중조 중 유일하게 묘소가 보존되고 있는 밀직부원군 묘 소를찾아참배하고있다. 뱚■ 오 졸 재 박 한 주 선 생 여 포 비 각 오졸재선생여포비각을찾은탐방단. 경북 청도군풍각면차산리178-1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