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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6월30일 토요일 2 (제138호) 기 획 경애왕의 죽음이 있은 927년을 더욱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다름 아닌 이 해는 실제 정월에서 11월에 이르기까지 고려와 신라의 연합군이 견훤에 대한 대공세를 펼친 시기였다. 곧 927 년은 왕건이 신라와 힘을 합쳐 견훤에 대하여 수세에서 공세로 의 대전환을 도모한 해였고 그 연합 공격의 주창자는 왕건이 아닌 경애왕이었다. 견훤은 궁지에 몰려 급기야 왕의 죽음이 있기 두 달 전 반전에 나서 영천을 차지하고 경주로의 침투를 노리기에이르렀다. 그런데 급박한 전시 상황이 펼쳐진 이즈음 경애왕의 이해하 기 힘든 상황과 장면이 잇달아 연출된다. 경애왕은 영천의 적 군이 왕도를 노리는 팽팽한 대치 상황에서 물샐 틈 없는 경계 망을 펴기는커녕 왕궁이 아닌 포석정에 행차했고,더욱이 연회 를 베풀었고, 또 그것이 원인이 되어 죽음을 자초했다. 게다가 견훤이 포석정을 에워싸고 덮치는 순간까지 경애왕은 일체 적 군의 동태를 보고받지 못했으며, 마지막 순간 왕을 경호한 군 사들의 존재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 일련의 공교로운 사건의 편린들은 상식선에서 풀기 힘든 여러 의문을 남기고 있으며, 그야말로 신라 내부의 복잡다단한 구도 속에서 총체적으로 재 음미할요소를던지고있다. 경애왕의 죽음 이후 왕건은 모처럼 맞이한 927년의 승기를 놓치고 이후 한동안 열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포석정 사건과 경애왕의 죽음은 927년 야심차게 전개한 왕건의 공세가 사실 상 무산되고 이후 견훤의 끈질긴 공격 앞에서 처절한 치욕과 회한을 참으며 때를 기다리는 수세로 전환하게 이끈 반전이었 다. 곧 경애왕의 죽음은 삼국 정세 변화의 중대한 전환을 알리 는 사건이었고, 그가 보인 종전의 행적 선상과도 동떨어진 돌 출사건이었다. 김부의 눈물을 대하고 있는 왕건은 서라벌 입성 직전 서라벌 동해안의 110여 성의 항복을 받았다 븮삼국사기븯 권12신라본기12경 순왕 4년 9월조, 븮고려사븯 권1 태조 13년 2월조.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 선에서 보자면, 견훤은 서라벌 침입 직후 별다른 이득 없이 그 저김부의괴뢰정권을창출하는선에서퇴군했다. 반면,왕건은 동해안 지역의 귀부를 받으면서 야금야금 신라 의영역을잠식하고있는주범이었다. 김부가 신라의 영역을 갉아먹는 주범을 우호와 선린을 앞세 워 서라벌로 초치한 것부터 정상적인 행위로 볼 수 없다. 이후 승세를 굳힌 왕건은 나날이 신라의 영토를 잠식하고 있었던 바,왕건이 견훤의 침입과 신라의 안위를 안타까워하면서 흘렸 다는눈물은조금의진정성이없다. 신라를 위협하고 있는 또 하나의 잠재적인 적대 세력(왕건) 을 앞에 두고,김부가 신라의 국사와 민생,사직을 염려하며 눈 물을 흘렸다고는 보기 어렵다. 김부의 언행과 뜨거운 눈물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으로서, 우국의 진정성이 없다. 까닭에 김 부의 눈물은 견훤과 자신의 관계를 정리, 결별하고, 견훤의 만 행을 성토함으로써, 친왕건의 노선을 표방하겠다는 충성의 눈 물로 비친다 김부가경애왕을제거했다는주장이 앞서여러논자에의해 제기된 바 있었다. 경애왕을 제거한 김부와 경애왕 죽음을 방관한 왕건의 만남은 매우 주목되는 바이다. 특히 견훤이 힘써 수립한 친견훤의 괴뢰정 권과 그 수반이었던김부가자청하여불과 4년만에반견훤의노선을표방 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김부의 언행은 견훤과의 정치적 결별 내지는 견 훤과 연대한 자신의전력을참회하고친왕건의충성을맹서하는형태로 해 석되어진다.그리고그 책임을당제김유렴에게돌렸다고보인다. 견훤의 침입으로 수립된 친견훤 정권이 4년 만에 반견훤 정 권의 수립으로 변모한 획기적 반전인 셈이 된다. 그것은 김부 가 정확히 4년 뒤 나라를 들어 왕건에게 바칠 매국의 예고편이 었다. 견훤은 자신과 대립한 경애왕을 제거하고 김부를 옹립하였 는데, 그것은 친견훤의 괴뢰 정권을 수립하려는 데 주된 목적 이 있었다. 한데 불과 4년 만에 김부는 자신의 입으로 견훤의 비행을 토로하며 반견훤의 기치를 표방하고 있다.이것은 견훤 조차 미리 예상하지 못한,견훤의 바람과는 정면으로 어긋나는 일로서, 견훤의 상황파악과 지인지안이 애초 잘못되었음을 드 러낸다. 거꾸로 견훤의 판단과 노력마저 무위로 돌릴 만큼 김 부의 변신과 처세,인성자체가 평범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 기도 하다. 동시에 그 정도의 헐리우드 액션을 할 정도의 인물 이란 점에서 김부야말로 대단한 임기응변과 처세의 달인이라 할 수 있겠다. 이후의 행적에서 확인되듯, 김부는 광종의 피비 린내 나는 살육에서도 생존하였고,경종의 장인까지 되어 천수 를다하고죽었다. 김부의 애곡이 민심의 향방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면,경애왕 의 장례 행위나 절차에도 민심은 십분 고려되었다고 보인다. 한데 경애왕의 주검은 남산의 정상부인 해목령에 안치된 것으 로 나타나 있다. 신라 56명의 왕들을 살펴보아도 山頂에 안치 된 경우는 없었다. 민심을 염두에 두었을 경애왕의 장례를, 가 장 눈에 띄고 오래도록 人口에 회자될 산정으로 택한 까닭은 도시무엇일까. 전술하였듯, 해목령은 효종의 세력권이었고 남산 신성에 의 해 둘러싸여져 있는 곳이다.경애왕의 죽음은 비상한 것이었기 에, 더욱 경애왕 죽음에 대한 루머를 차단하고 주검을 둘러싼 시비를 통제, 은닉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목적에서 경애왕 의 주검은 철저한 통제가 필요하였고, 남산 신성의 안, 그것도 효종의세력권안에서치러질수밖에없었다고보인다. 일연은 효종의 동선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효종은 바로 김부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효종은 당시 무슨 직책을 지녔으 며, 연령은 몇 살이었는가. 지금껏 효종을 화랑으로 보는 견해 가 있었다. 전기웅은 효종을 ‘화랑’으로, 그 무리를 ‘랑도’로 보아 화랑도 집단으로 규정하였다. 이어, 효종의 이 기록이 삼국유사에서는 유일한 화 랑도 기록이라 단언했다. 효종이 화랑도라 볼 뚜렷한 근거가 없으며, 또한 ‘랑’이 화랑을 의미한다는 그의 논리대로라면 삼국유사에서 효종이 유일 한 화랑의 기록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경솔한 속단’과는 달리 효종보 다훨씬앞선시기,다시말해화랑도가발흥하고제대로 작동하던시기,곧 진평왕대비형랑의기록이야말로 화랑의기사일것이기때문이다.그 외에 도 븮삼국유사븯권2기이2효소왕대 죽지랑기사도 빠뜨릴 수 없는 화랑에 보 태질기사일것이다. 가-1) A)①孝女知恩, ②韓댔部③百姓連權女子也. ④性至 孝,少喪父,獨養其母.⑤年三十二,猶不從人,定省不離左右,⑥ 而無以爲養, ⑦或傭作⑧或行乞, 得食以飼之. 日久不勝困憊, ⑨ 就富家請賣身爲婢, ⑩得米十餘石. ⑪窮日行役於其家, 暮則作 食歸養之. 如是三四日, 其母謂女子曰: ⑫“向, 食 而甘, 今則 食雖好, 味不如昔, 而肝心若以刀刃刺之者, 是何意耶” ⑬女子 以實告之. ⑭母曰: “以我故使爾爲婢, 不如死之速也.” ⑮乃放聲 大哭,女子亦哭,哀感行路. B)뛝時孝宗郞뛞出遊, 뛟見之, 뛠歸請父母, 뛡輸家粟百石及 衣物予之,又償買主以從良.郞徒幾千人,各出粟一石爲贈. C)大王聞之, 亦賜租五百石, 家一區, 뛡復除征役. 以粟多恐 有剽竊者,命所司差兵番守.標榜其里曰孝養坊,仍奉表,歸美於 唐室. D)孝宗, 時第三宰相舒發翰仁慶子, 少名化達, 王謂 雖當幼 齒, 便見老成, 卽以其兄憲康王之女, 妻之븮삼국사기븯 권48 열전8 효 녀지은 여기서 가-1)의 기록,‘郎之千徒’에서,‘郎徒’가 유추될 수 있 다. 그에 따라 郎으로만 나타난 효종 역시 화랑이라 규정할 여 지가 있다.하지만 가-1)구절 郎혹은 徒만으로 효종이 화랑이 었는지 그대로 단언하긴 어렵다. 왜냐하면 7세기 통일 전쟁기 를 마감하며 화랑도의 국가적 필요성은 현격히 떨어졌다.중대 전제 왕권이 강화되며 반관반민적인 화랑도의 존치 필요성은 아예 없어졌다. 김대문이 화랑세기에서 소회한대로 화랑의 무 용은 아득한 전설 속으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당시의 화랑도는 신 라군의 전략을 기획하는 핵심이나 근간이 아니라, 전황이 불리해지면 언 제나戰意를북돋우기위해희생되어질수있는, ‘자살특공대’와같은일개 소모적인 존재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던가 짐작된다. 특히 통합전쟁에서 보이는 화랑도들의 숱한 죽음은 화랑도 조직의 와해로 적잖이 연결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화랑도의 운명은 통합 전쟁이 완료되는 것과 더불어 점차 종말을고했을 것은아닐까 판단된다. 통합 전쟁이후국학이나입당출신 자들에비해이미 경쟁의상대에서도태되어힘의우열이 일방적으로 결정 되었기에, 역으로 김대문에 의해 화랑도에 대한 관대한 추모 사업이나 신 라사회를주도했던화랑조직의기존가치에대한 정리와반추의여유가생 겼던 것으로 보인다.(박순교,븮김춘추의 집권과정 연구븯, 경북대 박사학위 논문,1999,pp.227~228.) 사실 신라 하대 화랑의 행적, 실체는 묘연한 상황이다. 설사 효종이 화랑이었다고 한들 상대,혹은 중대의 화랑과는 엄연히 구별해야 마땅하다. 외려 효종이 화랑인지 아닌지 여부를 떠 나,분명히효종 휘하의 무리는,엄연히 개인이 거느린,사적무 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적 세력 양성 과정과 관련 하여선다음기록이주목된다. 나-6) ①年至十五. ②授差執事. ③每夜④逃去⑤遠遊. ⑥王使 勇士五十人守之. ⑦每飛過月城. ⑧西去荒川岸上.⑨[在京城 西].⑩率鬼衆遊. ⑪勇士伏林中⑫窺伺. ⑬鬼衆⑭聞⑮諸寺曉鐘 뛝各散. 뛞郞亦歸矣. 뛟軍士以事秦. 뛠王召鼻荊曰. 뛡汝領鬼 遊. 信乎. 郞曰然. 王曰. 然則汝使鬼衆. 成橋 於神元寺北渠.[一 作神衆寺誤. 一云荒川東深渠.] 荊奉劣. 使其徒鍊石, 成大橋於 一夜.故名鬼橋. 王又問. 鬼衆之中, 有出現人問, 輔朝政者乎. 曰有吉達者可輔 國政. 王曰與來. 翌日荊與俱見. 賜爵執事. 果忠直無雙. 時角干 林宗無子. 王勅爲嗣子. 林宗命吉達. 創樓門於興輪寺南. 每夜去 宿其門上. 故名吉達門. 一日吉達變狐而遁去. 荊使鬼捉而殺之 븮삼국유사븯권1기이1도화녀비형랑.. 나-2) ①第二十九太宗大王. 名春秋. 姓金氏. ②龍樹[一作龍 春.]角干, ③追封④文興大王之子也. ⑤ 삽眞平大王之女⑥天明 夫人. ⑦妃文明皇后文姬. 卽庾信公之季妹也. ⑧初文姬之失寶 姬.⑨夢登西岳⑩捨溺,⑪ 범滿京城. 진평왕은 15세의 비형을 왕의 근시 집단,곧 ‘집사’의 직책에 임명하였다(②). .비형 역시 진평왕의 ‘집사’의 직을 수용했다. 이렇게 보면 비형은 일단 진평왕의 뜻을 수용하고 추종했다고 볼 수 있다. 비형이 폐위당한 진지왕의 유복자인 점에서, 진평 왕의 이러한 조치는 잠재적 위협 세력을 가까이 두어 조용히 감시,거세하려 한 조치이거나 나-1)⑥에서진평왕이 勇士50인으로 하여금비형을지키게한 것이나, 나-1)⑪에서勇士들이 林中에엎드려비 형의 동정을 살핀 것이나, 나-1)뛟 에서 軍士들이 비형 무리의 동정을 진평 왕에게 事秦한 것 등은 비형에 대한 진평왕의 일정한 감시 의도가 개재한 것이라생각한다. 또한 비형이 낮이 아닌밤에도월성을벗어날 수없었다 는 점은 일반적인 관료의 삶과도 괴리된 것으로 밤낮을 월성 안에 머물러 있어야하는상황을드러낸것이라보인다, 미구의 정적 비형을 회유, 통제하려 한 회유책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쩌면 모두 를 포 함 하 는 양 면 책 일 수 도 있 다 . 하지만 나-1)③에서 매일 밤마다 비형은 ‘逃去’했다고 한다. ‘逃去’란 ‘도망하여 가다’란 뜻이다.그러므로 공간적으로는 진 평왕의 거소인 월성을 벗어난다는 것이자, 정치적으로는 진평 왕의 뜻에서 일탈한 것이라 여겨진다. 결국 ‘晝’와 ‘夜’를 두고 주간에는 진평왕의 세력권에 머물던비형이,야간에는 독자 노 선을 견지하며,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했던 셈이다. 그리고 이 것은 진평왕의 뜻에 반하는 것이었다. 나-1)⑥에서 진평왕이 용사 50인에게 비형을 지키게 한 것은 비형에 대한 분명한 禁 度를 설정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직접적 형벌, 가해를 가하지 않은것은진평왕의소극적대응이라고도해석된다. 일개 집사에다,15세에 불과한 비형에게 추종 세력이 있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비형에게 추종 세력이 보인다는 것은 그가 진지왕의 유복자란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고 보인다. 말하자면 비형의 추종 세력은 겉으로는 비형 일개인을 추종한 것처럼 보 일지 모르나, 본질상 비형의 아비, 진평왕에 의해 축출당한 진 지왕의 추종 세력이었으며, 舊 정치 질서를 지향하는 복고적, 반동적 성향을 띤 일군의 무리였다고 보인다. 결국 비형은 폐 위된 아비의 정통성을 후광으로 하여 독자적 세력권을 구축해 나아갔다고여겨진다. 효종은 1천(나-2)④), 혹은 幾千(가-1 B)幾에관한 용례를보 면, 기는 여러, 또는 數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諸橋轍次,븮大漢和辭典븮4卷, p.3947~3948). 또 기천을 수천 또는 몇 천이라 해석한 선례도 있다(이재 호, 븮삼국사기븯 광신출판사, 1997, p. 764)의 무리를 거느렸다.효종을 화랑으로 간주했을 때, 화랑은 대략 얼마의 낭도를 거느렸던 것일까.낭도의규모는다음기록에서추찰할수있다. 다-1)第三十二孝昭王代. 竹曼郞之徒有得烏[一云谷.] 級干. 隷名於風流黃卷. 중략 卒左人[鄕云皆叱知. 言奴僕也]而行. 郞 徒百三十七人,-중략-旣誕,因名竹旨.壯而出仕.與庾信公爲副 帥.統三韓.眞德,太宗,文武,神文四代爲腰宰.安定厥邦.初得烏 谷,慕郞而作歌曰.孝昭王代竹旨郞[亦作竹曼.亦名智官.] 위의 죽만랑은 죽지랑이다.그의 아비 븮삼국유사븯 권2기이2효소 왕대 죽지랑 는 진덕여왕 때 대신회의의 구성원 6인 중 한사람이 었던述宗이다. 븮삼국유사븯권1기이1진덕왕 죽지역시진덕여왕3년(649)8월,장군으로서도살성전투에 참여하였고 동왕 5년(651) 2월에는 파진찬으로서 執事 中侍가 되었다.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에 貴幢 총관이 된 후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였고, 동왕 8년(668) 6월 21일에는 京停 총관 으로서 고구려 원정에 참여하였으며,백제 故地 점령 및 동왕 1 1년(671)6월의 나당전쟁에서도 군공을 세웠다.빼어난 가문에 무용마저 갖춘 죽지가 거느린 낭도가 137명이었다. 이런 견지 에서효종이수천낭도를거느린것은흔한예가아니다. 당시 효종의 나이는 가-1 ‘幼齒’라는 구절에서, 비형에게서 보이는 15세를 상회하진 않았다고 여겨진다. ‘幼齒’한 효종이 특별한 무관의 관직을 옹유했을 리 없다. 그럼에도 이처럼 허 다한 무리를 거느린 이면에는 달리 아비의 영향력이 작용했으 며,그의 무리 역시,중앙 정부의 통제력에서 일탈된 사적 무리 였다고 믿어진다. 이는 나-1)⑪에서 진평왕의 勇士들이 林中 에 엎드려 사세를 관찰할 만큼,독자적이었던 비형의 무리와도 비견된다. 효종의 아비는 가-1) D)에서 확인되듯 당시 3宰相 舒發翰 仁慶이었다.비형이 죽은 아비의 영향력에 후광을 입었 다면, 효종은 살아있는 아비, 재상의 뒷배를 세력 터전으로 삼 았다고 여겨진다. 재상은 김춘추와 관련된 기록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권력장악의예비후보자들이 거치는일급의중요관직이다(木村誠,「新羅 の宰相制度」, 븮人文學報븯 , 東京道立大學, 1977). 신라에선 上宰相, 次宰 相(二宰),제3재상으로 등급이 지워져있고대개상대등,시중,병부령,사신 등의직에있는사람이 재상의직책을겸했다.그렇다고해서양자사이에필 요ㆍ충분조건이 성립한 것은 아니었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븮역주 삼국사 기븯 , 주석편하, p. 667, 804). 서발한은이벌찬, 이벌간, 우벌찬, 각간, 각찬, 서불한 등으로 불리며 신라 17관등 중 1위에 해당한다. 인경의 정치적 권 력이 이러했다면아울러막대한 재력까지지녔다고짐작된다. 효종이 사적 무리를 거느리고 활동했던 당시의 왕은 누구일 까. 가-1) C)에선 大王이라 모호하게 처리했으나 달리 일연은 나-2)④ D)에서 진성여왕이라 뚜렷이 밝히고 있다. 주지하듯 진평왕이 신라 역사상 최대 기간 집권하며 장수한 왕인 반면, 진성여왕은 즉위 3년부터 전국적 반란 속에서 왕권의 衰微를 보이다가 ‘살아서 양위한’ 신라 최초의 여왕이었다. 최치원, 븮양위 표븯,븮동문선븯권43 표전表箋 비형은 ①15세에 執事→⑤遠遊→⑧荒川→⑩率鬼→成橋→ 輔政者 추천→⑥天明夫人과의 혼인으로 이어진다. 이로 보면 진평왕은 비형 무리의 활동, 동선에 유의했던 셈이 된다. 한데 효종 역시 A)②遊行→C) 送穀→ 送衣袴→ 遣租→ 事達→왕의 포창(나-2) ④자료 D))→憲康王女와의 혼인(가-1)D)으로 이 어진다. 일개 민간의 한 여자를 구휼한 것만으로 왕의 姪壻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뭔가 의문이 남는다. 진성여왕이 효종과 혈연관계가 없거나 이 전에 생면부지의 관계였다면 이러한 기록의 문면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겠다. 한데진성여왕과 효종은8촌의혈연관계에있다. 좁디좁은서라벌 에서폐쇄적혼인이 주종인왕실에서8촌은가까운지친이라보아야할것 이다. 또한 그러한 핏줄의 가까움 이전에효종은 ‘지은’의 일전후로 진성 여왕과 다른 밀접한 유대를 맺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 유대의 근간이 다 름 아닌 여왕에 대한 색공이었다고 짐작된다. 효종의 아비 인경은 서발한 이자현직제3재상으로 나타난다. 이들은헌강왕대민공이래세력을줄곧 키워온 세력가의일문이라할수있다.곧민공-인경-효종3대에이르기까 지 그들은 철저한 권력 지향의 속성을 가지고 시중, 제3재상, 화랑등의 지 위를 차지하고 있다. 문성왕의 후손이긴 하나 기실 왕위 계승에서 멀찍이 배제된상태였기에, 역으로 왕위계승에서의일탈과 배제가더욱 권력욕을 자극했고,권력의지를자극했다고보인다. 이 점에서 효종의 활동과 동선이 왕과의 직접적인 맥락 속에 서 읽혀진다.여기서 진평왕과 비형의 관계는 4촌 븮삼국유사븯 권1 기이1 도화녀 비형랑, 븮삼국사기븯 권4 신라본기4 진평왕 즉위년조, 진 성 여왕과 효종의 관계는 8촌 김창겸, 븮신라하대 왕위계승연구븯, 경인문 화사, 2003, p. 89이다. 이처럼 비형, 효종 모두 자신의 세력을 키 웠고 왕가의 여식과 결혼했다는 점에서는 일견 비슷하게 비칠 수 있다. 하지만, 진평왕은 자신의 국정을 강화하고 보필하기 위한 차원에서 비형의 세력을 바라보았다. ‘권력의 발톱’을 숨 긴 채 길달의 배신을 조장, 비형의 세력을 분쇄하려 하기도 했 고 븮삼국유사븯 권1 기이1 도화녀 비형랑, 박순교, 븮김춘추의 집권과정연 구』,경북대박사학위논문, 1999, pp. 24~29 심지어는 자신의 딸과 의 결혼을 주선하는 등 전형적 양면책을 구사했다. 박순교, 븮김춘 추의집권과정연구븯,경북대박사학위논문,1999,pp.24~56 반면,진성여왕이 효종을 헌강왕 딸과 혼인시킨 것에는 다른 측면이 있다고 여겨진다.여왕은 효종을 堯의 제부로 삼음으로 써 요의 정치적 후원자가 되게 하려한 의도가 있었다고 짐작된 다. 븮삼국사기븯권11 신라본기11진성왕 9년 10월조에는 “자라면서 기골이 장대했고 요의 등 위에 두 개의 뼈가 불 룩하 게 솟아 있어 헌강왕의 핏줄임 을 알게 했다”고 한다. 한데 이것은 헌강왕을 상기시켜 요의 정치적 입지 를 다져주기 위한 진성여왕의 다분히 정치적 수사에 불과한 것이다. 기골 은 선천적인 체질로서 출생과 동시에 확인된다. 곧 이런 특성은 생래적 것 이다. 진성여왕이 보냈다는븮納旌節表븯에이미“臣長兄國王晸, 以去光啓三 年七月五日, 奄御聖代, 臣姪男嶢生未周졸, 臣仲兄晃權統藩垣, 又未經朞月, 遠謝明時.”라는구절이있어정강왕, 진성여왕의즉위 이전이미요의존재 는익히내외에알려져있었다.특히기록에는요가헌강왕의서자라고나타 나지만(븮삼국사기븯권11 신라본기11 효공왕 즉위년조), 헌강왕 슬하에는 다 른아들이보이지않는다. 이 서자가뜻하는바가뭇아들중의하나인지첩 의아들인지단언할수없다.그러나진성여왕이헌강왕의다른아들을언급 하지않고있은이상, 요가헌강왕의유일한 혈손일가능성이크다. 이점에 서헌강왕은요에게각별한애정을쏟았을것이다.그렇다면요란이름도아 비헌강왕의작명일가능성이크다.요의출현은권력교체나계승을의미하 는것으로받아들여졌을법하고(885년10월1일낮에금성을보았다는구절 (븮삼국사기븯권11신라본기11헌강왕9년조)은이러한일단의은유가아닌가 보인다.), 실제로도 요는 당시 헌강왕의 뒤를 이을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고 짐작된다. 하지만 헌강왕의 돌연한 죽음으로 요가 갓 돌을 넘기지 못했 고, 까닭에 왕위는 정강왕에게 이어지게 되었다(이배용, 븮신라하대 왕위계 승과 진성여왕븯, 븮천관우선생환력기념 사학논총븯, 1985, pp. 350-351). 정강 왕이임시로국권을잡았고나라를다스렸으나어디까지나임시방편이었음 은1년만에그가죽고진성여왕이그뒤를이었으나결국요에게다시왕위 가넘어온것에서도알수있다. 또한 효종 무리의 조직적이고 막강한 경제력은 당시 진성여 왕에게도 십분 고려됐을 것이다. 가령 효종 무리의 기부 액수 가 여왕이 하사한 액수를 몇 갑절 넘었다는 예에서 짐작이 가 능하다. 븮삼국사기븯에서는 효종 일가 100석, 효종의 무리들이 數千 석을 보낸 것으로, 븮삼국유사븯에서는 효종 일가 100斛, 효종의 낭도 1000석으로 나타난다.진성여왕이 보낸곡식은두기록모두500석이다.결국斛, 섬,석 은동일단위로 보인다는점에서븮삼국사기븯에의할경우효종과 그 무리의 희사액수는 여왕의 최소한 서너 배, 븮삼국유사븯에 의하면 2-3배 사이에 해 당한다. 이는효종일가의수월한 군사적힘, 경제적배경을단적으로 드러 낸일단이라보인다. 이와 관련, 진성여왕 2년(888년) 정월의 기록이 주목된다. 아래기록은내용상세단락으로나눌수있다. 라-1) A)二年春二月 少梁里石自行 B)王素與角干魏弘通 至 是 常入內用事 仍命與大矩和尙 修集鄕歌 謂之三代目云 及魏弘 卒 追諡爲惠成大王 C)此後 潛引少年美丈夫兩三人淫亂 仍授其 人以要職委以國政由是동倖肆志貨賂公行賞罰不公紀綱壞弛. 위기록중B,C단락은죄다진성여왕의난삽한성적행위를 내비치고 있다.B단락은 여왕과 위홍과의 相姦 내지는 相關,C 단락은 여왕과 少年 美丈夫와의 淫亂이 내용의 주를 이룬다. 그렇다면 A단락의 구절도 초자연적 현상, 상징이 아니라, 여 왕의 성적 문란과 연결하여 이해해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 이 경우 A단락의 ‘少梁里石’은 돌처럼 단단한 근육질의 남자를 은유하는 것이라 해석된다.밤이슬을 맞고 걸어 다니는 돌들은 젊은 사내의 형상을 닮았으며, 있어야 할 제자리를 떠나 궁궐 을 유랑하는 그 돌들의 범람은 진성여왕의 황음을 드러낸 것이 라 할만하다. 그리고 위 ‘少梁里’ 역시 ‘鷄龍’이 알영을 낳은 우 물이 위치한 곳으로서, 남산 산록에 위치해 있다. 효종 무리가 유행지로삼은포석정일대와도인접하여있음은주목된다.C) 에서 진성여왕이 가까이 한 少年 美丈夫는 어떤 집단에 속한 인물들일까. 신라에서 미장한 소년들에 관한 기록에서 화랑도 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신라의 화랑, 낭도는 치장, ‘美’와 연관 되기 때문이다. “唐令狐澄新羅國記曰擇貴人子弟之美者傳粉粧飾之名 曰花郞國人皆尊事之也”(븮삼국사기븯권4진흥왕37년조) 귀인의 자제가 화랑이 되어 분으로 장식을 삼았다지만,그것 은 화랑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낭도의 경우에도 역시 여러 장식과 치장을 통한 심미적 요소를 갖췄다고 여겨진다.여왕이 화랑도의 낭도들과 접촉했을 가능성은 이런 면에서 매우 높다. 이배용, 븮신라하대 왕위계승과 진성여왕븯, 븮천관우선생환력기념 사학논총 븯 ,1985,p.357.화랑도는 입신을 목표로 삼는 청소년 수련 단체였 다. 입사와 출세를 목적으로 한 이상 그들이 여왕과 결탁했을 개연성은 높다. 선덕여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김춘추의 아비 용춘이 황룡사 9층탑을 건축했듯 박순교,븮김춘추의집권과정연구븯, 경북대 박사학위 논문, 1999,pp.158~159,진성여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김부의 아비 효종이 여왕에게 휘하 낭도의 색공, 남총의 헌납을 주도했을 개연성이 있다. 현존 기록을 토대로 할 때,진 성여왕 치세에 있어 화랑으로서는 효종이 유일하다.여타 화랑 이있었다고해도효종처럼대규모였을리없다. 여왕은 자신에게 色貢을 제공한 장본인 효종에게 반대급부 를 베풀었던 측면이 강한 듯 보인다. 기실 효종 휘하 무리의 숫 자에서 확인되듯,진성여왕은 자신의 약화된 정치 기반을 보좌 하는 울타리 확보로서의 목적이 있었으며, 효종이 숱한 무리를 거 느린것,또효종무리의갹출과 구휼의정도(1백곡,1천석)가여왕의포상(5 백석) 정도를크게능가하는점은눈여겨볼 대목이다.이는국가의경제력 을 뛰어 넘는 개인의 존재, 영향력을 보이는 것이라 해석된다. 그 외 에 ‘색공’의 공급지로서 의미도 담겨 있었다고 추찰된다 효종이 진 성여왕의 배려로 요의 여동생과 결혼한 것은 전왕 헌강왕의 아들 요가 뒷 날 여왕의 후계자로 즉위했던 점에서(븮삼국사기븯 권12 신라본기12 효공왕 즉위년),또여왕자신의아들이 있은점등에서,흔히논자들사이에서심심 찮게 거론되는 후계자로서의 의미는 아니었다. 진성여왕에게는 여러 아들 이 있었다고 보인다. 진성여왕의 막내아들로서 양패가 보이는 점은 위로 최소한 두명의형제가있었다는말이 된다(븮삼국유사븯권2기이2진성여대 왕븡거타지), 양패는입당사로서나타나고있는데, 양패가10대중반의나이 로 진성여왕말년인897년에당에갔다하더라도그의출생시기는늦어도 여왕의 즉위 이전인 885년 이전이라야 한다. 양패가 둘째도 아닌 막내로 기록된 것에서 진성여왕의 첫 출산은 자연 늦어도 883년 이전이 틀림없 다.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 뱚역사비정(18) 뱛Ⅰ.927년경애왕최후의동선과의문 뱛Ⅱ.927년왕건과견훤의행위 뱛Ⅲ.927년을전후한김부의움직임 뱛Ⅳ.김부의아비,효종 뱛Ⅴ.진성여왕황음의조력자,효종 박 순 교 목 차 Ⅰ.927년경애왕최후의동선과의문 Ⅱ.927년왕건과견휜의행위 Ⅲ.927년을전후한김부의움직임 Ⅳ.김부의아비,효종 Ⅴ.진성여왕황음의조력자,효종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