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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6월30일 토요일 12 (제138호) 기획 임진왜란은우리역사상가장참혹하고치욕적인전쟁으로분류된다.1592년4월왜적이침입하여14일부산 ,15일동래,18일밀양,20일 청 도 군 이 함 락 되고,5월에는도성이함락되어국왕은서북으로몽진(蒙塵)하고8도가왜적에게유린(蹂躪)되는치욕(恥辱)을 당한가운데일부관리들은일신(一身)의 안위(安慰)만생각하고도망가기에바빴다.그러나청도에거주하는밀성박씨의동당(同堂)형제종반숙질들 은20일청도가함락되자비분강개(悲憤慷 慨)하여 함께 모여 창의(倡義)하기로 합의하고,그달 25일 기병(起兵)하여 적을 치는 등 청도지역을 방어하였 다.이로 인하여 운문산 주위 1백리 지 역 인 잔멸(殘滅)을 면하고 백성들이 평일처럼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임진왜란에 청도지역을 수성한 의병들의 활약상이 두드러진 것은 이들이 한 집안에 서나왔고이는투철한선비정신과지도층인사의책임과의무를다하는성인의정신에서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 어 이 들 의 진 충 (盡 忠 ) 보 국 (保 國 ) 의 충 의 정신을기려보며보훈의달을맞이하여임진왜란의청도지역14의사(義士)를소개해보고자한다. 임진왜란은 1592년 임진년에 왜적이 침입하여 국토를 유린한 사건으로 7년여 동안 지속되면서 조선사회 전반에 막대한 지장을 끼쳤다. 당시 역 사적 배경을 보면 조선은 200여 년간 지속된 사회 의 안정 속에서 차츰 많은 모순과 갈등이 노정되 고, 일반민들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군사·경제적 인 측면에서 양반층의 대역(大役)과 방납(防納) 으로 조세(租稅), 공부(貢賦), 부역(賦役) 등이 과도하게 부과되어 일반민들은 상당한 부담을 지 게 되었다. 이 때문에 실제 난이 발발하자 대부분 의일반민들은유리(遊離)피난(避難)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15세기 후반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따라 유럽 상인들이 일본에 들어와 활약하게 되면서 신흥 상업도시가 발생하자, 일본의 중세봉건체제는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등장하여 혼란을 수습하고 국내 통일을 이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 吉)는 봉건영주(封建領主)들의 영토팽창 욕구와 상인(商人)들의 해외 무역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 기 위한 침략전쟁을 꿈꾸었다. 그래서 서구에서 전래된 조총(鳥銃)으로 군사를 무장시키고 훈련 시키면서 축성술(築城術)과 해군술(海軍術) 등 을정비하였다. 이처럼 대륙침략을 치밀하게 준비해온 왜군 (倭軍) 제1군이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침입해 들어오면서임진왜란은시작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3로(路)로 나누어 북상하였다. 즉 제 1군은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하여 동래를 거 쳐 양산, 밀양, 청도, 대구, 상주, 조령의 중로(中 路)를, 제 2군은 19일 부산을 거쳐 경주, 영천, 안 동 조령의 동로(東路)를, 제 3군은 같은 날 김해, 죽도 부근으로 상륙하여 김해성을 공격하고 이어 서 함안, 창녕, 김천, 추풍령, 충주, 용인의 서로 (西路)를 이용하여 단시간에 서울까지 북상하였 다. 5월 2일 서울을 점령한 왜군(倭軍)은 8도(道) 를 분지(分地)하여 각 장수들로 하여금 점령지 내의 군정(軍政)을 실시하도록 했다. 당시 경상 도는 제 7군(軍)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맡게 되었으며,이어 각 지역은 그의 휘하 여러 장 수들로 하여금 점거하게 하였다. 이에 5월 10일 현풍, 18일 성주, 6월 12일에는 개령을 그 지역의 거점으로 삼아 낙동강 수로를 장악하여 후방으로 부터의 보급을 원활하게 하고, 아울러 북상한 그 들 군대의 후환을 없애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이 왜군의 전략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때 경상좌도 에 배치되어 주 보급로를 맡았던 일본군은 부산 8 천, 양산 동래 밀양 1천5백, 청도 대구 1천 5백 여 명이었다. 이와 같은 왜군의 침략을 맞아 조선 측의 대응 은 관군은 난 초기에 부산진 동래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지리멸렬(支離滅裂)되고 말아 항전다운 항전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무너지 는 형편이었다. 이것은 난전의 상황에 비추어 보 면이미예견된것이었다. 임진왜란 초기의 사정을 간략히 살펴보면 동래 가 함락되면서 동래부사 안상현이 순절하여 이에 순찰사 김수는 동래로 향하다 진주로 퇴각 하였 으며, 좌병사 이각은 도망하였고, 우병사 조대곤 은 웅주에서 참패당하는 등 변장(邊將)이나 수령 (守令)들도 모두 참패하고 물러남에 따라 김해, 양산, 울산, 언양이 연이어 침범 당하였으며, 그 후 4월 18일에는 밀양,20일에는 청도까지 왜군에 게점령당했다. 이때 청도군수 배응경은 싸우지 않고 순찰사 김수와 함께 취정산(현 팔공산)으로 한 때 피난 하였다. 이에 청도 군민들은 갈팡질팡하면서 피 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왜적의 침입에 접 해 관할 수령 배응경이 도망해 버리자 임진왜란 전에 침략을 위해 수축한 청도읍성 조례산성 철 마산성 등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점령당하 고말았다. 이러한 때에 관군을 대신해 국가와 향토를 보 전하기 위해서 분연히 일어선 사람들은 다름 아 닌 조선 초 이래 각 지방에서 재지적(在地的) 기 반을 쌓아온 각 지방의 사족(士族)들이었다. 그 리 고 이 렇 게 의 병 들 이 각 지 방 에 서 일 어 날 수 있 었던 것은 일본군의 점령이 전면 점령이 아닌 거 점 점령으로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점령지 외 의 지역에서는 의병들이 활약할 수 있었기 때문 이었다. 청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방사 족들에 의해 의병활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으 니 대표적인 경우가 청도 밀성박씨 일문(一門)의 14의사(義士)들이다. 청도 14의사의 성씨는 박씨이며, 본관은 밀성 이다. 밀성박씨의 적장자인 은산부원군(휘 영균) 의 아들 송은 박익 선생의 후예로 송은 선생은 시 호가 충숙으로 고려 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분으로 그의 아들 융(融)은 이조정랑을 역임하였 고, 손자는 소고공 건(乾)으로 밀성에서 청도로 이주한 계기는 청도에서 큰 세력을 유지한 이가 병 조판서 김철성(金哲誠)이었는데, 소고공(휘 건)이 그의 딸과 혼인을 계기로 청도 밀성박씨 소 고공파를여는입향조가되었다. 소고공 박건은 무과에 올라 훈련원 봉사를 거 쳐 용양위 부사직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승원 역 시 무과를 통해 입사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 정 3품) 충순위 부사직을 역임하였고, 사후 충순(忠 順)의 시호가 내려졌다. 박승원은 밀양에서 이주 해 온 아버지 박건의 기반과 또 외가인 판서공 김 철성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물려받았고,또 진주 하씨 경절공 하숙부 딸과의 혼인을 계기로 경제 적 배경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당시 청도 수야 지역의 광활한 농장을 소유했던 경절공 하 숙부는 아들이 없었다. 따라서 그의 재산이 사위 인박승원에게거의상속되었던것으로보인다. 박승원의 장자 박하담의 문집『消遙堂逸稿』에 의하면, 지대(池臺)는 중외조(重外祖) 判書金公 (金哲誠)에게, 奴婢는 外大父 敬節 河公(河叔溥) 에게서 물려받았다 한다. 이리하여 박승원은 아 들 삼형제 이름을 河淡· 河淸· 河澄으로 지었는 데, 이는 외가인 진주하씨를 잊지 말라는 뜻을 담 은것이었다. 부 사 직 승 원 의 장 남 하 담 (河 淡 ) 은 중 종 1 1 년 (1 516년)에 사마시에 합격한 후 유일로 천거 받아 현량과에 추천되었으나 응시하지 않고 청도의 운 문산 아래의 눌연(訥淵)에 정자를 짓고 소요당이 라 이름하고 당대의 거유들과 교류하며 여생을 보냈으며,차남 하청(河淸)은 호가 성와(城窩)이 며,예조정랑을역임하고지평에추증되었다. 소요당의 장남 영(潁)의 호는 성효재(誠孝齋) 로 순릉참봉을 역임하였으며, 참판에 증직되었 고, 아들 경신(慶新), 경인(慶因), 손자 찬(璨), 우(瑀) 숙(琡), 지남(智男), 철남(哲男), 선(瑄), 차남 이( 視)의 호는 모재(慕齋)로 장사랑을 역임 하고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아들 경전(慶傳), 경 윤(慶胤), 경선(慶宣)과 손자 린(璘), 구(球), 성 와공 하청(河淸)의 손자 근(瑾) 등 14명이 운문 산일대에서창의의깃발을올렸다. 청도지역이 왜군에 의해 함락되자 비분강개하 여 4 월 2 3 일 에 이 들 1 4 명 의 형 제 숙 질 이 거 느 린 가노(家奴)100여명을 동원하여 창의를 논의하면 서 전호(佃戶, 소작인)를 포함하여 200명 이상의 군사를 확보하여 활동의 시작하였다. 이때 인근 지역의 재지사족과 지역민에게 통문을 돌려 산속 에 숨어 있지 말고,의병에 참여 할 것을 종용함으 로써 4월 말경에는 피난민 등을 합쳐서 500여명 으로 진영을 갖추어 나갔다. 이후 지역의 명망 있 는 사족(士族)들을 유사(有司)로 임명하여 의병 활동을주도해나갔다. 의병의 군사규모가 늘어남에 따라 전투를 효율 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군대를 조직화하고 군무 를 분담시킬 필요성이 있어 5월 2일에 의병부대 를 조직화하고 박경전(朴慶傳)을 의병대장으로 하고, 대장(代將)에 박경인(朴慶因), 아익장(亞 翼將)에 박경윤(朴慶胤), 박경선(朴慶宣) 복병 장(伏兵將)에 이정욱, 김계후, 정희호 야격장(夜 擊將)에 배원우,유격장(遊擊將)에 이 경,수문장 에 정광필로 각기 부서를 정하였다. 이밖에도 박 선(朴瑄), 박찬(朴璨), 박지남(朴智男), 박철남 (朴哲南), 박린(朴璘), 박우(朴瑀), 박구(朴球), 박숙(朴琡), 박근(朴瑾)이 함께 보좌하며 많은 전공을세웠다. 밀성박씨 가문의 14의사의 활동은 삼창(三倡), 삼순(三殉), 팔의(八義) 운동이라 한다. 이는 박 경인의 후손인 학전(鶴田) 박정상(朴廷相)이 찬 (撰)한 ‘충의록(忠義錄)에 ’倡義三忠(창의삼충) 이요, 殉義三忠(순의삼충), 擧義 八士(거의 팔 사)‘라고 한데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 倡義三忠 (창의삼충)은 박경신(朴慶新), 경전(慶傳), 경윤 (慶胤)의 종반(從班, 4촌)이요 殉義三忠(순의삼 충)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경인(慶因), 경선(慶 宣)의 종반과 이괄의 난에 순절한 삼우정 박경신 의 조카 우(瑀)이며, 擧義 八士(거의 팔사)는 선 (瑄), 찬(璨), 린(璘), 근(瑾), 숙(琡), 지남(智 男), 철남(哲南), 구(球) 등이다. 이러한 사실은 임진왜란 당시의 전투에 있어서 한 지역의 같은 가문에서 14의사가 나와서 싸웠다는 점에서 특별 한의미가있다. 밀성박씨 가문의 의병활동이 상당히 활발하였 음은 임진왜란 이후에 14의사 중에서 12인이 녹훈 (錄勳)된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으며, 상당한 전 과 를 거 두 었 음 을 짐 작 할 수 있 다 . 즉 선 무 원 종 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오른 박경신, 2등에 오 른박경전,박경윤,박린,박근,박지남,박철남,3등 에 오른 박선, 박찬, 박숙, 박구, 진무원종공신 1등 에 오른 박우 등이 그들이다. 구체적으로 삼우정 박경신과 두 아들 지남, 철남에게 내린 공신교서 와박경전등의선무원종공신녹권이남아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일본군의 주력은 중로 (中路)를 따라 4월 20일 청도를 침략한 이후 일본 군의 후속부대가 계속 한성으로 북상하였다. 일 본군은 군량 운반과 후방기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각 지역에 소규모 부대를 주둔시켰다. 이때 청도 에서는 군수 배응경과 휘하의 관군들이 피난 도 망하였지만 4월 25일 청도 밀성박씨 가문을 중심 으로 의병이 창의하였다. 이들은 임진왜란 초기 에 운문산으로 피난하였다가 이곳에서 창의를 논 의하고 지역하회의 사족들에게 동참하도록 촉구 하였다. 청도 밀성박씨 14의사가 청도에서 의병활동을 전개 할 수 있었던 것은 15세기 이래로 청도에서 마련한 재지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소요당 박하담 3형제는 청도 향교, 향사당 건립, 향약실시, 선암서원 건립 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밀성박씨 문중은 청도에 정착하 는 과정에서 처가 쪽의 재산확보를 통해서 많은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런 기반은 실 제의병활동에많은기여를하였다. 청도 14의사의 의병활동은 초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에는 4월 25일 창의 이후부터 청도 군수 배응경, 조전장 박경신이 부임해 올 때까지 였다. 청도의병은 이후 인근 지역의 재지사족의 동참 을 계기로 군사수를 늘려나갔다. 이때는 의병대 장 박경전을 중심으로 선암서원 인근, 자신들의 생활 근거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전투는 대 규모 전투보다 소규모의 전투가 대부분이었다. 한편 청도의병의 후기는 군수 배응경과 조전장 박경신이 후임한 7월부터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 지였는데 관군과 의병이 연합하여 전투력을 고양 시킨 사례로서 주목된다. 이때는 관군의 일원으 로서 청도를 중심으로 대구, 경주, 밀양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이 과 정 에 서 가 장 문 제 가 된 군 량 과 무 기 의 조 달도 의병 초기에서 자체 조달을 하다가 후기에 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 해결해 나갔다. 그리고 의병의 구성과 조직은 청도지역 중심의 지역 방 위군의성역을띠었음을보여주었다. 청도 밀성박씨 14의사는 임진왜란 의병사에서 유래가 드문 한 문중의 인사들이 의병을 주도한 사례로서 주목할 만한 하다. 이들 가운데서 12명 은 임진왜란 이후 선정된 선무원종공신에 선정되 었다. 이를 계기로 청도 밀성박씨 가문은 임진왜 란 이후 청도지역의 회복을 주도하고 향촌사회에 서영향력을확대할수있었다. 이처럼 청도 14의사의 밀성박씨 가문도 임진왜 란에서 활동한 선대에 대한 기억을 재생하면서 지역사회와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며, 이를 토대로 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을 유지 확대시킬수 있었다. 그런 점에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활동은 조선후기 사회의 지속성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문 제이기도하였다. (본 기사 내용은 지난 2015년 한국국학진원 주 최 조선 선비의 충절의 주제의 학술발표에서 김 강식 해양대학교 교수께서 발표한 ‘임진왜란 시 기 청도 밀성박씨 14의사의 의병활동’에서 간추 리고보완한자료입니다.) ※청 도 1 4 의 사 각 개 인 의 행 장 등 은 추 후 에 별 도로다룰예정입니다. 임진왜란의청도밀성박씨14의사(義 士) 선조 유지를찾아븣 임진왜란의발발과의병(義兵) 선무원종공신록권(보물1237호).삼우정박경신선생종중보관(임호서원경의관전시). 충 렬사-경북 청도군 이서면 용강서원 내. 충렬사는 의병을 일으켜 청도, 밀양, 경산 등지에서 일본군에게 타격을 가한 박경신(朴慶新),박경인(朴慶因),박경전(朴慶傳),박경윤(朴 慶胤), 박경선(朴慶宣), 박선(朴瑄), 박찬(朴璨), 박지남(朴智 男), 박철남(朴哲南), 박린(朴璘), 박우(朴瑀), 박구(朴球), 박 숙(朴琡),박근(朴瑾)등14명의의사를모신사당이다. 경의관-경북 청도군 금천면 임오서원 경내. 경의관은 보물 로 지정된 선무원종공신녹권과 삼우정 박경신, 지남, 철남 등 3부자가 임진왜란에서 받은 절지수와 교지 등 임진왜란 자료등이전시되고있다. 14의사묘정비(용강서원입구).14의사묘정비(廟庭碑)는18 76년에 건립한 것으로 비문은 동몽교관(童蒙敎官) 김시질 (金是瓆)이찬했다. 왜란당시의상황을매우상세하게기술 하고 있으며 비각의 구조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묘정비 는1998년8월3일경상북도기념물제129호로지정되었다. 절지수(節祗受)-1592년(선조 25)11월 17일∼1593 년(선조 26) 3월 12일까지 발급된 13매의 절지수 (節祗受)는박경신등 삼부자의 전공(戰功)에대한 포상장(褒賞狀)이다. 박경신의 것이 8매, 아들 지 남은2매,철남은3매이다. 청도14의사(義士)가문의내력과의병창의 14의사의추승 맺음말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