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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하게 되자율리를모방하게 되었고야탑리에는수많은탑이 세워졌 다고 전해 오고 았는사실과 연계하여 보면 율리는 전통의 불교마을이었 다는 사실이다. 율-리가 불교의 전통마을。1라는 방증은 십수개에 휩}는 율리 마을의 골짜기 이름이나산능선의 이름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율리는 백제멸땅 이후인 고려(高麗)때까지 불교가 성행하였다가 몽고 (豪古)난 때에 영장산금강사(金剛좋)가불타 없어지고수많은 미록부처 님들도 부서지고 쓰러져 없어져 버 린 후에 조선(朝蘇) 초기에 신일사(新 日츄)라는 절이 다시 세워졌으 나 임진왜란(王辰優亂) 때에 다시 불타 없 어지고 지금은 빈 절터만이 남아 있다. 율동에서 가장 오래된 문중은 순흥(順興) 안씨(安民)로 입향조인 판군 자감사(判軍資藍폐) 안구(安없)의 묘를 세종(世宗) 23년(1441)에 쓴 후에 중종(中宗)때에 이르러 안당(安塊) 안처겸(安處讓)의 모반사컨(諸됐事 件)에 연루되어 전라도로 도피하였다가 후손 중 한 집이 근자에 다시 이 사를와서살고있다. 다음이 의령남씨(宜寧南民)로 사헌부감찰(司憲府藍察)을 지낸 남준 (南俊)이 세종(世宗) 말년에 돌아갔다고 하는데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후 손들에게서 전해 오는 전설이다. 남준(南俊)과 그의 아들인 남념(南|줌)의 묘를쓰고후일에 자손들이 세거하였다. 다음에는 성종(成宗) 때에 청주한씨(淸州韓民)로 입향조 한계희(韓繼 禮)는 추충정난익대공신(推忠靖難翊數功멀)과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 (純誠明亮經濟住理功닮)에 녹훈(錄勳)되어 서평군(西平君)을봉군(封君) 받았으며,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증 의정부영의정(議 政府領議政)을 제수받았다. 성종 13년(1482)에 한계희(韓繼衝)의 능침 ([埈寢)을 쓴 후 계속하여 530여년을 세거하고 있으며 진주(쯤州) 유씨(柳 民)는 홍문관직채학(弘文館直提學) 유종선(柳終善)이 선조(宣祖) 11년 (1578) 졸(후)한 후에 묘를쓰고 세거하여 왔다. 전주이씨(全州李民)는 감 사(藍司) 이덕 영( 李德榮)이 경종(景宗) 원년(元年. 1721)에 졸하자 처가 79 돌 마 연 의 유래 한동 억 앓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