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page

67 돌마면의 유래 한동억 1만명의 군사를 이끌고왔다는기록 등은백제에서 태자의 위치가군사 통수권자(軍事統帥權者)임을중명하여 주는 기록들이라하겠다. 문주왕(文周王) 3년(서71477)에는 맏아들 삼근(三규)을 봉(封)하여 태 자로 삼았다는 기록과 무왕(武王) 33년(서기632) 봄 정월(正月 )에 맏아들 의자(義慧)를 책봉(冊封)하여 태자로 삼았다는 것과, 의자왕(義忽王) 15 년(서기655) 봄 2월에 태자궁(太子宮)을 극(極)히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수리하였다는 기록들은 모두가 태자의 정치적으로 강력한 입지와 군사 상의 위치가 얼마나 견고하고 강력한 것인가를 확인시켜 주는- 대목들이 라할수있다. 이러한 태자가 거처하던 세자궁이 칭곡동(용~洞)에 있었디는 사실에 우리 지 역에는 강력한 백제의 군사문화의 혼(塊)이 짙게 스며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돌마면(突馬面)이라는 지명이 생성된 근거임을 각인시켜주는사실들이라고생각한다. 고려(高麗)시대에는 광주목장(廣州救場)으로 유명하였던 지역이고 조 선왕조(朝蘇王朝) 때에는 대열(大閒)이라는 군사훈련장으로 더욱 유명 하였던 곳이다. 대열이라는군사훈련은 팔도(八道)에서 병사틀을차출하 여 모으고 왕이 직접 군사들의 좌작진퇴(坐作進退) 둥의 개인기와 무예 를 시험하고 지휘관인 :Aj-;: 균들의 통솔능력과 진법구상(陣法構想) 동을 일 일이 점검함은월론부대전술을통한부대 전력을시험하논중-대한훈련 으로서 비상시를대비한국가의크나큰중요행사였다. 돌마면과낙생면의 경계로흐르던숭내(候川)물은백제시대부터 군사 들을 훈련시킬 때에 인마(A馬)가 먹던 식수원이었다. 『삼국시-기(三國史 記)』 「백제본기(百濟本紀)」 온조왕(溫祚王)편에 보면 온조 28년(서7]10) 에 왕세자 다루(多隻)를 태자(太子)로 삼고 지방과 중앙의 군시-업무를 맡 겼다고 기록되어 있고 역사학계의 원로들의 이야기도 백제는 왕세자인 태자에게 군사업무를 맡기는 것이 관행이었다고 전하여 온다. 그 이유는 태자가 병권을 잡으면 충성을 맹약하고 따르는 무리가 헤일 수 없이 많 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