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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토 돌마면 율리 의 한순회(韓順會), 한백봉(韓百鳳) 등은 1919년 고종 장례 식에 참여한 후 3.1운동을 직접 목격하였다. 이들은 면내의 유지들과 접 촉하면서 시위운동을 준비하는 한편 낙생면의 초대면장 남태희(南台 熙)와도 연계하여 거사를도모하였다. 특히 한순회가 천도교 광주교구장 이었던 점과 면장을 지낸 남태희 등이 운동을 주도한 것은 농촌의 지식 인층이 시위운동에 적극적이었음을반증하는 것이다. 3월 27일 새벽에 한백봉 등은 율리 동민 50여명을 인솔하고 뒷산에 올 라가 봉화로 시위를 예고하는 등의 주도면밀함을 보였다. 꺼사 당일 10 시경 분당리 장터에서 군중이 운집하자한백봉등은만세사위를주도하 여본격적인시위운동이전개하였다.면내를순회하는동안시위군중이 늘어났고 오후에 낙생면 소재지인 판교리에서 남태희의 주도하는 시위 군중과합세하였을 때 시위 군중은 3,000여명에 달하였다. 한순회가 천도교에 관여한 사실에서 보면 당시 천도교인들은 국권회 복과 독립이 당면한 사명이라는 인식하에 독립을 쟁취하려는 의지력이 강하였다. 천도교인들은 독립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는 한편, 태극기를 극비리에 제작하고 운동자금 모집 등도 관여하는 등 만세운동을 주도하 는데에도적극적이었다. 자금모집과 관련해서 1919년 5월 15일 ‘정광조(鄭廣朝) 피고사건’ 에 관하여 증인 검광준(金光俊)을 신문하였던 기록을 살펴보면, 김광준은 당시 평안도 평원군 순안면 포정리 67번지에 살고 있었고 순안 천도교 교구장을 맡고 있었는데, 정광조카 독립운동비에 쓰기 위해 천도교 각 신도들로부터 특별성미금을 모집한 사건과 관련하여 조사블 받게 되었 다. 특별성미금은 바로 만세운동의 자금으혹 쓰인 것인데 감광준은 특별 성미금이라하여 모집한 것은 없으며, 각 신도들로부터 기도미 대금으로 서 수금한 것을 전교사등으로부터 받은 일이 있다고 대답하고 있다. 김광준은 평 원군 일대에서 합계 522원 10전을 수령하였고, 이것을 동 생 김홍준(金센俊)에게 가지고가케 하여 경성 천도교중앙총부에 전달하 6。 문화총서 @ 돌마 마을지( 下) .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