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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돌마지역의 역사와 문화 윤종준 피해상황을 보도하면서 천수답(天水짧) 대작물(代作物)은 거의 전멸상 태라고하였다. 이러한상황에서 돌마면지역에서는가뭄을해결하기 위 한 민중 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즉 돌마면 여수리 주민 200여명은 절 박한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우선 좋은 보(狀)를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데 의견을 모으고, 집행위원장에 이춘영( 李泰泳) 씨를 선출하고 지주 40여명과 작인(作A) 200여 명의 동의를 얻어 가지고 서 류를 작성하여 보(狀)를 허가해 달라고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이처럼 식 량난이 극심해지자 사회는 어수선해지고 1936년 7월에는 돌마면시무소 에까지 도적이 침입하여 숙직원의 자전거를가지고그 옆돌마공립보통 학교에서 유리창을 뜯고 들어가 말, 되, 휘장 등을 절취하는사건이 보도 되기도하였다. 성남은 조선 후기 세촌면, 대왕면, 돌마면, 낙생면을모체로 하였는데, 세촌면은 1914년 중부변에 편입되었다가 1964년에 성남출장소가 설치 되었다.현재의성남시가지를놓고볼때옛세촌면과,분당구의탄천서 쪽이 낙생면에 해당되고 수정구의 탄천 서쪽이 대왕면과 대체로 일치하 며, 돌마 지역은 탄천의 동쪽과 세촌면이었던 하대원동 일대가 해당된 다. 해방 이후 성남지역에는 1946년 3 월에 단대, 수진, 복정, 상대원, 호 L곡, 탄리의 6개리를 관할하는 중부면 성남출장소가 수진리에 설치되었다. 이때가 ‘성남’ 이라는 이름이 행정에 공식적으로 사용된 시초라 할 수 있다. 해방 이후 가까스로 일어나려던 생산시설은 1950년의 6 .25 전쟁으로 막대한 피해를 몰고 왔으며, 생산시설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주민의 생 활상은 참담하였으며 전 국토가 거의 초토화되고 말았다. 「 자유신문」 1951년 12월 12웹자와 13일자에 기사화된 ‘경기지역 재민구호상황’을 살펴보면, 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