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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에는 관임관(判任官) 5등으로 승진하였으나 1906년 7월 27일 통 신원 관제가 폐지되면서 그만 두고 1907년 11월 1일 제실(帝室)과 국유 (國有) 재산 또사국에 임시로 고빙(展體)되었다. 이 때 월 보수는 20환이 었고 다음해 1월 22일에는 9品 사무원으로 임명 받았다. 통신원(通信院) 은 1895년 고종 32년에 농상공부(農商I部)에 소속되어 설치되었던 통 신국(通信局)이 1900년(광무-4)에 명칭을 바꾼 것이다. 통선국에서 하던 일은 주로 통신 · 선박에 관한 일을 맡아 보다가 1900년(광무-4) 통신원 (通信院)으로 개칭하면서 비서 · 번역 · 체신 · 관선(管船) · 회계 · 문서 의 6과(課)가 설치되었으며 관원으로는 총판(總辦 ; 刺任官) 1명, 회판(會 辦 ; 刺任官) 1명, 관방장(官房長 • 奏任官) 1명, 참사관(參事官) 5명, 과장 24 각 5명,기사(技師) 1명, 번역관2명,주사(主事) 15명이 있았다. 하 a 토 이근학 면장은돌마면에서의 집무 기간이 6년으로다른 띤장에 비하여 긴 편이고, 이매동의 농업기술센터 앞 도로변에는 이근학 면장에 대한 송덕비가 서 있다. 1935년 5월 26일 동아일보에는 당선된 띤협의원(面協 議員) 명단이 기사로나와 있는데,돌마지역의 면협의원은- 한용회(韓龍 會), 최하영(崔夏永), 이주현(李柱鉉), 홍순석(洪淳錫), 이만규(李B免珪), 이병철(李秉함), 이갑규(李甲珪), 정규원(鄭圭元)이다. 이 중= 이갑규는 면 장을지냈던띤물이다. 일제시대의 사회는 극도로 불안하였고, 신문의 사회면에는 도박사건, 4인조 강도사건이 대서특필되기도 하였다. 일본의 침탈로 인심은 흉흉 해지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는 주민들의 생훨상은 피폐하 기만하였다. 심지어는돌마면 탑동에 사는 이문숙이라는사람이 신문에 광고를 내기릅 5촌 성선이가 문서를 위조하여 자신의 전답을 서울에 나 가 팔러 돌아다니고 있으니 누구를 물론하고 사지 마라는 광고를 내는 일까지 생기는-세상이었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이 극에 달하던 1936년에는 전국적으로 가 뭄이 들어 「조선 중앙일보」 8월 19일자에는 함경도 지 역의 극심한 가뭄 문화총서 @ 돌마 마을지( 下) .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