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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번지 의무사령부 정문입구 죄측에 있는 부친 묘소 아꽤 지좌(子坐) 로이장(移慶)하였다 유경붕(柳景朋, 1574∼?) 휘(譯)는 경붕(景朋), 자(字)는 서경(西敬). 종오품계(從五品階)인 수운 판관(水雲判官)을 지냈으나 정사공신(靖社功톰)에 녹권(錄卷)되어, 증 (體) 송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답) 겸(暴) 경연참찬관(經鐘參贊官)을 제 수(除授)받았다. 묘소는 증(廳) 숙부인(淑夫A) 청주한씨(淸州韓民)와 율동L 산 13-1번지 계좌(쫓坐)에 합평(合중)이었으나 의무사령부 부지로 수용되어 동소 산 188 13-1번지에 이장(移舞)되었다 율동의 진주유씨(쯤州柳民) 가문(家門)에 는 세분 이외에는 학문에만 전념하고 벼슬을 하지 않았다고 전해 오고 향토 문화총 서 @ 있다. 돌마 마을지( 下) 유창석(柳昌錫, 1865∼1952) 휘(譯)는 창석(昌錫), 자(字)는 문숙(文뼈). 선생(先生)은 학문(學文)을 숭앙(累{대)하여 한학(漢學)을 두루 업 렵(涉繼)하였다. 기미년(己未年) 3 · 1독립만세운동(獨立萬歲運動) 당시에 망국(亡國)의 한(‘恨)을 품고 승 하(昇週)하신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많은 우국지사 (憂國志士)들파 협의하여 독립운동(獨立運動)에 헌신하기로 약속하고 향리(짧6里)로 돌아와서 한백봉(韓百鳳) 한순회(韓順會) 동의 애국지사 (愛國志士)들과 협의하여 장년층(長年層)의 지도자급(指導者級)으로서 역할을 확실히 하여 3월 26일 저녁부터 밤새워 마을 뒷산인 모란봉(救꺼­ 峰)에서 봉화(峰火)를 올리는데 앞장서 마을 주민들을 독려하고 3월 27 일 분당리(益}훨里) 장날을 이용한 만세시위(萬歲示威)에 마을 주민들이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하고 설득한 3. 1독립만세운동(獨立萬歲運動)에 기여한 공이 지대(至大)하고 물산장려운동(物塵짧剛運動)과 농민운동 앓횡